영웅 서사 속 틈새 시장…뮤지컬계에 부는 히든 피겨스 바람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1.21 09:01  수정 2025.11.21 09:01

뮤지컬은 태생적으로 화려함을 좇는 장르다.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전달하기 위해, 비범한 능력을 지닌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시대를 호령한 1인자, 혹은 파멸적인 천재들의 서사를 주로 다뤄왔다. ‘모차르트’, ‘나폴레옹’, ‘명성황후’ 등 제목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최근엔 스포트라이트의 사각지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으나 조명받지 못했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뮤지컬 '비하인드 더 문' ⓒ

지난 11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개막한 뮤지컬 ‘비하인드 더 문’(내년 2월 8일까지)이 이런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도약으로 기록된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세상은 달 표면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들이 달을 걷는 동안, 사령선에 홀로 남아 궤도를 돌았던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를 조명한다.


달에 착륙할 수도, 지구로 돌아갈 수도 없는 고독한 우주 공간. 작품은 영웅의 환희 대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완벽한 조력자가 되기를 선택한 한 인간의 내면에 집중한다. 김한솔 작가는 “현실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사람을 무대에서만큼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다”며 이 작품을 1인극으로 창작한 계기를 밝히기도 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유준상과 정문성, 고훈정, 고상호 4명의 배우가 번갈아 연기한다.


창작 뮤지컬의 수작으로 꼽히며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일 테노레’ 역시 맥락을 같이한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오페라라는 낯선 서양 음악에 매료되어 꿈을 꾸었던 청춘들을 그린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이 역사책에 굵직하게 기록된 위인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테너였음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인선’을 모티브로 창조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작품은 그가 이룬 성취의 결과값보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그 자체에 방점을 찍는다. 난세 속에서 예술을 지키려 했던 이름 없는 청춘들의 땀방울은 관객들에게 ‘성공’보다 값진 ‘열정’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이러한 ‘인물 재발견’의 흐름은 단순한 소재 고갈의 대안이 아니다. 이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인물을 입체적으로 뒤집어보는 시도로까지 확장된다.


2024년 초연하고, 내년 4월 재연을 앞둔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는 유한양행의 창업자로 잘 알려진 기업가 유일한 박사를 조명한다. 하지만 초점은 그의 경영 철학이 아닌,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면에 맞춰져 있다. 기업가라는 사회적 성공 이면에 감춰져 있던,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첩보 작전에 뛰어들었던 그의 ‘이중생활’을 무대화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우리가 알던 위인의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김향안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라흐 헤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인 이상의 연인, 화가 김환기의 아내라는 수식어로만 불려왔다. 그러나 뮤지컬은 그녀를 누군가의 ‘뮤즈’나 ‘내조자’가 아닌, 스스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주체적인 예술가이자 삶을 개척해 나간 인물로 복권시킨다. 천재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삶을 무대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 서사의 빈칸을 채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 뮤지컬 관계자는 “화려한 조명 뒤에서 고군분투하거나, 실패하더라도 꿈을 향해 나아가는 ‘보통의 존재’들에게서 관객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면서 “영웅이 되지 못해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 또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현실적인 위로’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제작사 입장에서도 소재의 확장은 반가운 일이다. 이 관계자는 “이미 알만한 위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역사라는 텍스트 안에서 숨어 있던 인물들을 발굴하는 작업은 창작진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고, 관객들에게는 신선한 지적 유희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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