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첫 선박 5천척 인도 이후…"격차는 AI에서 갈린다"
울산의 경험·손기술, 데이터로 바꾸는 산업 대전환 시동
HD현대가 지난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실시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단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HD현대
“중국을 생각하면 오히려 위기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난 20일 경기도 성남 HD현대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조선·해양 산업 AI 기술 개발 협력 업무협약(MOU)’ 체결식.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인사말에서 먼저 “실적이 좋다”는 평가를 인정하면서도 곧바로 중국을 언급했다. 전날 울산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마친 뒤였지만 정 회장의 시선은 축하가 아니라 ‘다음 50년을 버틸 수 있느냐’에 맞춰져 있었다.
이런 위기의식은 근거 없는 과장이 아니다. 최근 한국경제인협회가 발표한 설문에서도 철강·디스플레이에 이어 반도체·전기전자·선박까지 한국 10대 수출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5년 뒤 모두 중국에 뒤처질 거란 응답이 나왔다. 전통 제조업이 한국 경제의 뼈대를 이루는 현실에서 ‘지금처럼 가다가는 조선까지 밀릴 수 있다’는 불안은 현장의 체감에 더 가깝다.
앞서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 열린 기념식은 한국 조선산업이 쌓아올린 반세기 성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였다. HD현대는 1974년 첫 선박 인도 이후 51년 만에 세계 최초로 선박 5000척 건조 기록을 달성했다. 조선 역사가 더 긴 유럽과 일본에서도 없던 숫자다. 하지만 숫자가 말해주는 ‘과거의 영광’과 현장 분위기가 보여주는 ‘향후 5년’ 사이의 간극이 한국 조선업이 마주한 현실이다.
HD현대가 내놓은 해법은 결국 AI다. 전통적인 조선소의 강점이던 숙련공의 감각과 손기술을 인공지능 안으로 옮겨 심어 제조 경쟁력을 다시 설계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미 HD현대는 그룹 내 AI 전담 조직을 대표이사 직속 인공지능전환(AIX)추진실로 격상했다. 중국의 인건비 우위와 물량 공세 앞에서 선택지는 ‘더 정밀하고, 더 빠른 조선소’뿐이란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 회장이 ‘미래 조선 경쟁력은 AI 활용도가 결정한다’고 못박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박 한 척의 품질을 좌우하던 용접사의 손끝, 도장 공정의 온도와 습도를 가늠하던 숙련자의 감각이 앞으로는 AI가 참고하는 데이터로 바뀐다. 수십 년간 쌓인 암묵지가 디지털 형태로 정리되면 설계의 정밀도와 생산의 반복성, 조립의 정확도, 작업자의 안전까지 산업 전 과정이 AI 기반 구조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AI 조선소 구현은 기업의 결심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인프라와 대규모 영상데이터 처리·보관 체계, 산업기밀 보호를 위한 보안 규제 정비까지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영역이 적지 않다. HD현대가 조선 AI 데이터를 ‘국가 전략자산’으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가 이번 협약을 두고 “대표 사례를 만들겠다”고 강조한 배경이 된 부분이다.
한국 조선업은 과거에도 변곡점마다 새로운 항로를 열어왔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영국 선박회사 회장을 만나 지갑 속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그 위에 새겨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한국은 이미 16세기에 철갑선을 만들었다”고 설득해 조선소 설립을 위한 차관 도입을 이끌어냈던 일화는 여전히 회자된다. 당시에는 ‘철갑선’이라는 상징과 도전 정신이 자금 조달의 근거가 됐다면 이제는 데이터와 AI, 자동화가 새로운 설득의 언어가 된다.
5000척의 기록은 한국 조선업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항해 일지다. 그러나 앞으로의 50년을 어떻게 설계할지는 아직 쓰이지 않은 지도에 가깝다. 경쟁의 기준이 강재와 선가가 아니라 데이터와 자동화된 공정으로 옮겨가는 시점에서 조선업의 생존 전략은 ‘얼마나 빨리 AI를 산업의 언어로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싸움의 무대는 물량이 아니라 알고리즘이다. HD현대는 이미 항해를 시작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