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모호한 기준부터 바로잡아야" 책임공방 우려 커져
노조 '히든카드' 전락 우려...취지 훼손·남용 가능성 제기
전문가들 "작업중지는 안전 목적일 때만" 전제조건 강조
작업중지권 확대 추진이 속도를 내는 가운데 악용 가능성이 크고 산재 예방 효과도 확실치 않다는 지적이 잇따른다.ⓒ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산업안전 강화를 명분으로 한 작업중지권 법제화 논의가 속도를 내면서 현장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발동 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방향의 입법이 추진되자 산업계는 “재해 예방 효과는 검증되지 않은 채 노사 분쟁과 현장 혼란만 커질 것”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산업안전·노사 전문가들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준”이라며 강한 우려를 드러냈다.
11일 산업계에 따르면 현재 추진되는 작업중지권 확대 방식은 기준이 모호하고 악용 가능성이 큰 데다 산재 예방 효과도 확실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치권과 노동계는 최근 잇따른 산업재해와 대리운전기사 사망 사건 등을 계기로 작업중지권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노사와 함께 ‘안전한 일터 위원회’를 구성해 협력하겠다고 밝혔고, 민주노총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통한 노동자 참여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작업중지권 확대가 ‘필수 입법과제’라며 속도전을 예고했다.
입법 논의도 구체적 단계에 들어갔다.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일 발의한 개정안은 작업중지권 요건을 기존 ‘급박한 위험’에서 ‘급박한 위험이 우려되는 경우’로 완화하고, 근로자 대표·명예산업안전감독관까지 작업중지 요청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산업 현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조사에서 기업의 57%가 작업중지권 완화에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준 불명확으로 인한 책임 소지’(42%)였고 이어 ‘남발 우려’(25%), ‘생산 중단 피해’(17%), ‘노조의 쟁의 수단화 가능성’(16%) 순이었다.
특히 제조·건설 등 다단계 하도급 구조에서는 작업 중단이 잦아질 경우 납기 지연과 원청–하청 갈등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미 정부의 노동안전 종합대책으로 과징금·영업정지 등 제재가 강화된 상황에서 기업 부담이 임계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위기감도 조성됐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기준 완화가 불러올 혼란을 강하게 경고했다. 정 교수는 행정고시 합격 후 고용노동부에서 20여년 간 근무한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다.
정 교수는 “한국의 작업중지 제도는 이미 선진국보다 센 편인데 여기에 ‘우려’까지 넣겠다는 건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이어 “요건이 ‘우려’로 바뀌면 모든 상황이 우려로 해석될 수 있다”며 “기준이 사라지고 판단이 제각각이면 노조가 자의적으로 작업을 멈출 수 있는 칼자루를 쥐게 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작업중지 요건 완화 인식 및 부정적 생각 이유.ⓒ한국경영자총협회
작업중지 제도가 일부 사업장에서 협상용 ‘히든 카드’처럼 활용되는 현실도 문제점으로 꼽았다. 정 교수는 “산업안전을 순수한 안전 문제로 보지 않는 게 문제”라며 “노동자 안전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임금·근로시간 등 다른 것을 따내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규제 중심 대책에 대해서도 “예측도, 이행도 불가능한 제도로는 현장 안전이 개선될 수 없다”면서 “산재예방 효과는 없고 분쟁만 커질 수 있으며, 중소기업은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짚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도 문제의 핵심으로 ‘기준 부재’를 지적했다.
임 본부장은 “현장에는 이미 긴급피난에 준하는 권리가 있고 위험하면 기업도 자율적으로 작업을 중지시키고 있다”며 “명확한 기준 없이 권한만 확대되면 현장은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또한 “특히 노사 관계가 불안정한 사업장에서는 안전 목적이 아닌 근로조건 개선이나 다른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될 소지가 크다”며 “작업중지권은 합리적 요건에 기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성규 가천대 길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도 작업중지권 자체에는 동의하면서도 ‘절대적 전제 조건’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36년간 산재예방 분야에서 활동하며 국내 산업보건 제도 설계에 참여해온 인물이다.
강 교수는 “작업중지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산업안전 문제를 임금이나 노사협약 같은 다른 의제와 연결해선 안 된다”면서 “교섭이 막힐 때 안전 문제를 들고 와 작업을 멈추는 건 제도 취지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중소기업 중대재해처벌법 예방을 위한 노사정 합의에서도 ‘산업안전 문제를 노사 문제와 연결하지 않는다’고 명시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유럽은 50년 전에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지금은 산업안전 이슈와 노사협상 이슈를 절대 연결하지 않는다”면서 “작업중지는 순수하게 산업안전 목적일 때만 발동돼야 하고, 그 전제가 지켜진다면 제도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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