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믿었는데…도망간 선장에 해수부는 '망연자실'
공약과 사진만 챙긴 ‘140일 장관’…뒷수습은 공무원 몫
정치적 무리수…800여명 공무원만 희생양 됐다
통일교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지난 1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귀국해 의혹 관련 입장을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이 140일 짧은 재임을 마쳤다. 이임사는 그동안 성과로 단당히 포장했다. 마치 2년 이상 재임한 장관처럼. 140일의 짧은 재임에도 그가 남긴 상처와 혼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침몰 조짐이 보이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선장처럼, 그는 해수부라는 배와 그 안에 타고 있는 공무원·현장을 뒤로한 채 홀로 빠져나갔다.
140일 만에 도망친 수장
전재수 전 장관은 세종에서 부산으로의 해수부 본부 이전과 6개 산하기관 동반 이전을 진두지휘하겠다고 나섰다. 부산 이전이 정권 초 핵심 공약으로 떠오르자, 그는 “정치가 아니라 정책 효과”를 내세우며 이전의 얼굴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통일교 관련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되자, 의혹은 전면 부인하면서도 장관직은 스스로 내려놓는 길을 택했다.
해수부 이전 로드맵은 여전히 진행형인데, 그 한복판에서 수장이 자리를 던지고 사라진 것이다.
해수부라는 거대한 배가 거센 풍랑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누구보다 늦게까지 배를 지켜야 할 선장은 오히려 가장 먼저 구명조끼를 챙기고 구명정에 올라탄 사람처럼 행동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사람이 선장인데, 전 전 장관은 그 상식을 거꾸로 뒤집고 가장 먼저 탈출구를 향해 뛰어간 셈이다.
해양수산부가 세종에서 부산 동구 IM빌딩·협성타워 임시청사로 단계적 이전을 시작한 지난 8일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정부세종청사 해수부 표지석 앞을 지나고 있다. ⓒ뉴시스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탈출한 무책임한 선장
위기 상황에서 끝까지 조타실을 지켜야 할 수장은 보이지 않았다. 남겨진 것은 방향을 잃은 채 파도에 휘둘리는 선원들뿐이다. 선장이 먼저 도망친 배에서 나머지 선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언제 멈출지 모르는 기관실과 흔들리는 갑판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해수부 직원들과 산하기관 종사자들이 지금 처한 현실이 정확히 이 그림에 가깝다.
침몰 위기를 맞은 배에서 선장이 책임을 지고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상식이라면, 전 전 장관의 선택은 상식을 정면으로 거스른 퇴장이었다.
조정이 어려운 순간일수록 선장은 키를 더 꽉 잡아야 한다. 그런데, 그는 키를 놓아버리고 조타실을 떠난 뒤 “배가 어떻게 되든 알아서 버텨보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다.
승객과 선원보다 자신의 안전을 먼저 챙기며 배를 떠난 선장을 영웅이라 부를 수 없듯, 의혹이 제기되자 가장 먼저 자리를 던진 수장을 책임 있는 공직자로 부르기는 어렵다.
리더십은 위기 속에서 함께 버티는 힘이다. 그의 선택은 위기 직전 혼자만 빠져나가는 ‘책임 회피술’에 가까웠다. 수장은 맨 마지막에 배를 떠난다는 오래된 규범을, 전 전 장관은 가장 먼저 출구로 향하는 방식으로 뒤집어버렸다.
이 사퇴는 조직을 위한 결단이 아니라, 조직을 남겨둔 채 자신만 빠져나간 퇴각이었고, 리더십이라 부르기보다는 탈출 본능에 가깝다.
현 정부의 안일한 이전 설계
문제는 개인의 도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해수부 부산 이전은 정권의 대표 공약으로 추진됐다. 세종시의 반발과 노조의 우려, 직원들의 생활 기반 붕괴 위험이 수차례 지적돼 왔다.
그럼에도 정부는 “계획대로 간다”는 속도전만 반복했을 뿐, 장기간에 걸쳐 그 자리를 지킬 공무원들의 삶과 조직의 시간 위에 설계된 전략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종 청사 정리, 부산 임시 청사 마련, 주거·교육·인사 대책 등은 여전히 난제가 산적한 상태다. 이 복잡한 과정을 설득하고 조율해야 할 장관이 가장 먼저 사라지자, 남은 실무진은 계획 집행과 현장 반발, 정책 공백이라는 삼중고를 떠안게 됐다. 결국 정권은 이전의 ‘성과 사진’만 챙기고, 비용과 혼란은 공무원들에게 떠넘긴 셈이다.
해양수산부가 세종에서 부산 동구 IM빌딩(본관)·협성타워(별관) 임시청사로 단계적 이전을 시작한 가운데 지난 9일 이사업체 관계자들이 첫 이삿짐을 부산 본관 건물로 옮기고 있다. 해수부 이전을 위한 이사는 약 2주 간에 걸쳐 5t 트럭 249대와 하루 6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해 실국별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뉴시스
정권과 장관은 유한하지만, 조직과 정책은 그 자리에 남는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부산 이전을 단임 정권의 정치적 치적으로 다루는 데 더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수장이 도망쳤을 때 어떤 공백이 발생할지에 대한 대비는 부재했다. 침몰 위험이 있는 배를 무리하게 출항시키고, 정작 풍랑이 거세지자 선장부터 먼저 배를 떠나도록 방치한 꼴이다.
남는 사람들의 시간 위에서 설계해야
해수부 직원과 산하기관 종사자들은 앞으로도 부산과 세종, 항만과 어촌을 오가며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장관은 바뀌고 정권은 교체되지만, 실제로 이 이전의 결과를 감당할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는 공무원과 현장이다.
정권과 장관이 떠난 뒤에도 계속 살아갈 도시와 현장을 기준으로 이전을 재설계하지 않는다면, 해수부 부산 이전은 ‘균형발전’이 아니라 ‘정치적 이력서 한 줄’로 기록될 것이다.
전재수 전 장관의 도망은 그 폐해를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선장이 먼저 도망친 배가 더 이상 배가 아니듯, 수장이 도망친 부처는 더 이상 정책의 집행기관이 아니라, 위기 관리의 책임을 떠안은 미아가 된 조직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것은 ‘누가 도망쳤는가’를 넘어, 다시는 선장이 먼저 구명정으로 달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제도와 문화다. 공무원은 그 자리에 남지만, 정권과 장관은 언제든 떠난다는 단순한 진실을 정책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 한, 또 다른 ‘도망친 선장’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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