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일리안 DB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쪽이 넘어가고 있다. 2025년은 글로벌 AI 패권 경쟁이 한층 격화돼, 국가 간 경쟁으로까지 번진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오픈AI를 축으로 초거대 AI 생태계를 키우고 있고, 중국도 알리바바·텐센트 등을 앞세워 거센 추격에 나서고 있다. 한국은 네이버(하이퍼클로바X), 카카오(KoGPT), LG(엑사원) 등 독자 모델을 보유한 몇 안 되는 나라에 속한다.
AI 경쟁력의 뿌리는 결국 데이터와 플랫폼이다. 양질의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학습·검증·서비스로 연결하는 거대한 유통망이 있어야 모델이 고도화된다.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플랫폼은 검색·쇼핑·메신저 등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와 이용자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특화된 소버린 AI의 기반을 다져왔다. 플랫폼은 단순한 ‘중개’가 아니라 AI 산업의 토대이자 디지털 주권의 인프라다.
국내 플랫폼 산업의 성장은 다른 산업의 경쟁력도 함께 끌어올린다. 플랫폼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실시간으로 연결해 전자상거래, 디지털 콘텐츠, 모빌리티 등에서 혁신의 허브로 작동한다. 이미 많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는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쿠팡 마켓플레이스, 배달 앱 등을 통해 판로를 넓혀왔다. 우리 경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이 플랫폼을 통해 고객을 만나고 효율을 높이면서 산업 전반의 생산성과 경쟁력도 커진다. 플랫폼이 국외 시장을 더 적극적으로 개척하면 국내 콘텐츠·상품의 수출 통로가 넓어지고 연관 산업의 경쟁력 강화로도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12월 9일 발의된 ‘온라인 플랫폼 중개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안’은 신중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입점업체 보호와 상생이라는 목표 자체를 부정하기 어렵지만, 기술 패권 경쟁이 거칠어지고, 소버린 AI 확보가 국가 생존 전략으로 부상한 시기에 혁신의 핵심 기반인 플랫폼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방식이라면 결과적으로 한국의 디지털 경쟁력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선택이 될 수 있다.
가장 먼저 우려되는 대목은 법안이 플랫폼 운영을 지나치게 절차로 고정시킨다는 점이다. 예컨대 법안은 중개거래계약서에 상품 노출의 순서·형태·기준 등을 기재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플랫폼의 핵심 자산인 알고리즘과 추천·랭킹 시스템을 사실상 공개하라는 취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노출 기준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악의적 판매자가 이를 역이용해 허위 리뷰, 어뷰징, 품질 낮은 상품의 상위 노출을 시도하는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 구글·아마존·틱톡 같은 글로벌 기업이 알고리즘을 철저히 비공개로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쟁이 전장이라면, 특정 기업에게만 갑옷을 벗으라고 하는 셈이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데이터 학습과 알고리즘 고도화에 달려 있는데, 이를 사실상 ‘공개 압박’으로 만들면 기술 주권에도 부담이 된다.
제재 체계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법안은 위반 시 매출액의 10%까지 과징금 부과를 가능하게 하고, 보복 조치에 대해서는 손해액의 3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구조를 둔다. 문제는 보복 조치로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 넓게 열려 있다는 점이다. 가품 판매, 소비자 기만, 시스템 악용 등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하거나 노출을 제한하는 정당한 조치까지도, 사후에 “분쟁조정을 신청했다” 등의 사정과 결합되면 보복으로 다퉈질 여지가 커진다. 플랫폼이 소송 리스크를 우려해 문제 판매자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규제가 공정의 이름으로 ‘자정 기능’을 무디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중복 규제 논란도 피하기 어렵다. 불공정거래행위 규율은 이미 공정거래법 체계로 상당 부분 대응이 가능하다. 새로운 특별법이 동일 영역을 넓게 덮으면 기업은 이중의 준수 비용과 법적 리스크를 떠안는다. ‘온라인’이라는 거래 방식만으로 더 무거운 의무와 제재를 정당화하기도 쉽지 않다. 규제의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이 과도하면 산업 전체에 불필요한 비용을 남긴다.
ⓒ데일리안 DB
무엇보다 현실에서 가장 두려운 지점은 ‘역차별’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외국 플랫폼의 국내 영향력은 빠르게 커졌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 같은 초저가 플랫폼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이용자 기반을 넓혀왔다. 법안은 적용 범위를 “국내 이용사업자와 국내 소비자 간 거래 개시를 중개하는 경우”로 명시해, 명목상 외국 사업자에도 적용할 수 있지만, 집행의 실효성 측면에서 외국 사업자의 자료 제출 지연, 매출·거래 규모 파악의 어려움 등 구조적 한계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규제가 국내 사업자 중심으로 작동하면 국내 플랫폼이 계약·정산·서류·조사 대응 등 준수 비용을 늘리는 동안, 외국 플랫폼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더 빠르게 확장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내 플랫폼만 손발이 묶인다”라는 인식이 굳어지면, 규제의 정당성은 물론 시장의 신뢰도도 함께 흔들린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주권 문제도 커진다. 국내 플랫폼 경쟁력이 약화돼 소비자가 외국 플랫폼으로 더 이동하면, 쇼핑·결제·위치 등 방대한 생활 데이터가 통제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흘러갈 수 있다.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때 국내 규범과 집행이 실질적으로 닿지 않는 사업자를 상대로 구제받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도 냉정히 따져야 한다.
법안 논의에서 흔히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을 참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유럽의 규제 도입 배경은 한국과 사뭇 다르다. 유럽은 구글,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공룡에 대적할 자국 플랫폼이 부재한 특수한 상황에서, 미국 기업의 시장 지배를 견제하기 위한 디지털 주권 확보 및 자국 산업 보호 전략으로 강력한 규제를 도입한 것이다. 일본 역시 세계적 플랫폼 기업이 거의 없다. 이런 나라들이 자국 산업 보호와 주권 확보를 고민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드물게 자체 플랫폼을 가진 나라다. 있는 자산을 과도한 규제로 위축시키는 선택은 장기적으로 국익에 역행할 수 있다.
플랫폼 산업의 건강한 발전과 공정한 질서 확립은 규제가 아닌 자율과 혁신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정부는 업계와 함께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이나 협약을 마련해 민관 협력으로 문제를 개선하고, 불공정 행위에 대해서는 현행법으로 엄정 대응하는 투트랙 접근이 바람직하다. 미국은 사후 경쟁법 집행(반독점 소송 등)으로 빅테크를 다루고 있으며, 유럽 역시 DMA 시행 과정에서 유연한 적용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 역시 플랫폼 기업들이 창의적 신사업에 도전하고 글로벌 확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하고 응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의 도래는 곧 플랫폼 경쟁의 세계화를 의미하며, 이러한 시대에 국내 플랫폼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고 키우는 길은 지나친 규제가 아닌 혁신을 최대한 장려하는 환경 조성에 있다.
과도한 족쇄로 날개를 묶어버린다면 국내 플랫폼 산업은 위축되고, 그 파장은 고스란히 우리 경제와 미래 세대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내 플랫폼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더 넓은 시장으로 나가게 하는 정책적 설계다. 공정의 이름으로 혁신의 숨통을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율과 책임의 원칙 위에서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논의가 다시 정돈돼야 한다.
글/ 최한별 전북대학교 행정학과 교수(chb@jbnu.ac.kr)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