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중계 업무보고’라는 이름의 대통령 판타지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12.17 07:07  수정 2025.12.17 07:07

대중의 호기심에 부응한 퍼포먼스

“쓰여 있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네요”

이젠 ‘정의의 담지자’가 됐다는 걸까

이재명 대통령이 12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ㆍ개인정보보호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 대통령실

“최초로 생중계되는 업무보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매우 높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놓은 정부 업무보고 평가다. 자신의 지휘하에 생중계 업무보고가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자평(自評)이라고 하겠는데 그게 자화자찬이었다. 그는 16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이 말에 이어 생중계 업무보고의 배경과 의의를 설명했다.


“정책과정이 투명하게 검증돼야 하고, 그 과정에서 집단지성이 모여야 정책에 대한 신뢰도도 커진다. 그리고 국정의 완성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후에 열린 보건복지부 등의 업무보고 모두 발언에서 “시청률이 엄청 높지 않을까 싶어요. 요새 넷플릭스보다 더 재미있다는 설이 있던데…”라며 웃음으로 만족감을 표하기도 했다.


“약간 긴장되죠? 또 무슨 폭탄이 떨어질까? 제가 무슨 숫자를 외웠거나 또 모르거나 이걸 체크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니까요. 다 안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지요.……왜곡 보고 하지 말자. 왜곡은 의도가 들어 있는 거잖아요.……보고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거, 숨기는 거죠? 이것도 문제지요. 그저 투명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이거는 결코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통령은 아주 대범하게 말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해서는 안 될 말’에 대한 주의 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대중의 호기심에 부응한 퍼포먼스

“존경한다니까 정말 존경하는 줄 알더라.”

언젠가 그가 사회적 논란을 촉발했던 말이다. ‘말의 신뢰성’ 문제도 제기됐지만 ‘이중적 화법’의 습관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낳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의 말은, 들리는 대로 믿고 반응하면 안 된다. 발언의 뒷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서 판단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생중계 업무보고가 물론 긍정적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국민에게 정책 입안의 배경과 과정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는 대중의 호기심에 부응하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일 개연성이 더 높다.


“업무보고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에게 하는 것”이라고 이 대통령은 말했지만, 그 보고회를 주재하는 사람이 누군가. 대통령이 긴장할 필요가 없다며 “모르면 모른다 하라”고 했다고 곧이곧대로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말은 장·차관이나 실무자들에게는 오히려 “모르는 게 있으면 안 되지”라는 경고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말이지만 이런 행사는 ‘대통령 판타지’, ‘대통령의 원맨쇼’ 무대로 변질될 소지가 농후하다. 관인대덕(寬忍大德)한 리더십, 정감 있고 소탈한 인성, 행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 탁월한 문제 간파 역량, 즉각적인 대안 제시 능력 등이 저절로 과시된다. 보고자들은 들러리 역할을 면할 수가 없다. 그 자리가 그런 자리다.


생중계는 대통령의 즉흥적·충동적 지시를 유발할 위험성이 크다. 이 대통령은 2016년 겨울의 광화문 촛불집회 때 ‘사이다 발언’으로 전국적 인물이 됐다. 청중들을 속 시원하게 해 주는 격하고 모진 발언으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그 ‘사이다’라는 게 즉흥성·충동성의 표출일 경우가 많다. “과연 대통령은 다르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시쳇말로 ‘오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전 국민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대통령의 힘이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질 법도 하다. 지난 12일 이 대통령과 이학재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사이에 오간 대화(이런 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야말로 위력과시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쓰여 있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네요”

이 사장은 윤석열 대통령 때 임명된 사람이다. 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전 정권을 ‘내란세력’으로 매도하며 사법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민의’의 이름으로도 확실하게 매장시키고 말겠다는 결의를 기회 있을 때마다 드러내고 있다. 그 적대세력에 소속돼 있던 사람이 정권 교체 후에도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다면 이 대통령의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근거법 및 기관폐지→새로운 법 및 기관 창설’의 방법으로 기어이 내쫓은 정권이다. 이학재 사장인들 좋게 보였겠는가. 대통령의 질문에 대해 원하는 답을 시원하게 내놓았으면 또 모르겠지만 주춤거리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100달러짜리 지폐를 책갈피에 끼워서 나가면 안 걸린다는 데 실제 그러냐고 물었고 이 사장은 머뭇거리다가 그건 세관의 소관 사항임을 어렵게 설명했다. 아마도 대통령이 잘못 알고 질문했다고 지적하기가 어려워서 그랬겠지만, 설명이 길어지니까 이 대통령은 “참 말이 기십니다(깁니다)”라고 면박을 줬다.


그것만이 아니라 “왜 자꾸 옆으로 새요?” “(즉각적인 답변이 없자) 지금 다른 데 가서 노세요?” “거기 임기가 얼마에요?”라고 심하게 힐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집트 후루가다 공항 개발사업 관련 질문에 이 사장이 요령 있게 대답을 못 하자) “(자료에) 써져(쓰여) 있는 것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네요”라고 이죽거리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빠’ 관련 질문을 하면서도 임기를 물었다. 박 이사장도 이 사장처럼 전 정부에서 임명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사장이나 박 이사장을 상대로 듣기 거북한 말을 했다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의 체통이 걸린 문제이니까.

이젠 ‘정의의 담지자’가 됐다는 걸까

이 대통령이 이런 방식의 업무보고를 구상하고 실행하게 된 배경은 뭘까? 아마도 포퓰리스트적 마인드일 것이다. 대중 정치시대의 정치인이 대중의 환호에 몰입하게 되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하겠지만 과몰입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하기까지 하다. 대중과의 과도한 상호작용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대의민주정치를 치명적으로 훼손할 수도 있다(좌파 정당과 정치세력의 ‘직접민주주의’ 지향은 그래서 위험하다).


지금의 좌파 정권은 ‘국민은 그 자체로 진리고 정의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라는 인식 혹은 명제를 정권 정당성·정통성의 토대로 삼는다. 정치적 수사로서의 국민, 그러니까 추상적 국민에게는 무한한 충성을 맹세하며 모든 약속을 다 한다. 다만 그 약속은 안 지켜도 된다. 보상받을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상은 지지집단으로서의 국민에게만 하면 된다.


정권 측은 정치적 동원 대상으로서의 국민과 자기들을 지지하는 국민을 위해 과도한 공약을 하고 거기에 국가 가용자원을 쏟아붓는다. 반면 반대쪽에 선 국민은 홀대하고 심하게는 배제한다. 그리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사회 안정’ ‘정의 구현’의 명분으로 징벌 대상 명단에 이들 중 일부를 올린다.


이 대통령은 정부 업무보고 자리에서조차 국민을 분할해 대응했다. 인국공 이 사장에 대해서는 권력자로서의 위상을 각인시키려 의도적으로 모욕 준다는 인상을 풍겼다. 도저히 대통령의 것이라고 여길 수 없는 언사였다. 국민 앞에서 공공연히 망신을 준 것이다. 정권 지지 국민들의 박수를 예상한 과잉 감정 표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회에 자신이 과거에 심판받던 그 사람이 아니라 심판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는 것을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했을 수도 있다.


“심판자는 정의의 담지자다. 이제 누구도 나와 정의 논쟁을 벌일 생각은 말라. 이것이 권력이다.”


그의 표정에서 읽힌 권력자의 자기 선언이다. 그나마 현장에서 적대세력(이라고 여길 법한 사람)을 추방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대단한 인내심’이라는 찬사를 보태서?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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