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류현경이 감독, 각본, 주연, 제작, 편집, 심지어 배급까지 도맡은 '1인 제작자'로 관객 앞에 섰다. 김오키 감독의 영화 '하나, 둘, 셋, 러브' 현장에서 '뭐라도 찍어보자'는 농담처럼 시작된 촬영이 결국 장편영화가 됐고 이제 극장 개봉까지 눈앞에 둔 것이다.
ⓒ류네
영화 '고백하지마'는 '하나, 둘, 셋, 러브' 촬영이 끝나고 뒤풀이처럼 모인 펜션에서 충길(김충길 분)이 현경(류현경 분)에게 느닷없이 고백을 하면서 벌어지는, 어딘가 불편하지만 묘하게 웃긴 상황들을 담았다. 세 달 뒤,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관계의 어색함과 설렘, 좌절과 위로가 뒤섞인 로맨틱 코미디가 완성됐다.
첫 장면은 그야말로 우연과 즉흥의 산물이었다. '하나, 둘, 셋, 러브' 촬영이 비 때문에 취소되고 음향 기사도 떠난 상황. 김 감독이 빌려놓은 펜션 안에서 배우들은 '그냥 핸드폰으로라도 찍어보자'는생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냥 '뭐라도 찍어보자'였어요. 대본도 하나도 없었고요. 카메라를 세워두고 이것저것 놀다 보니까 충길 씨가 갑자기 고백을 한 거예요. 롱테이크로 쭉 찍었는데, 제가 불편하면서도 재밌게 웃고 있더라고요. '그럼 이 고백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더 불편해지는 상황을 만들어볼까?' 거기서 1부가 시작됐어요"
펜션에서의 '고백 사건'으로 1부로 마무리한 뒤, 류현경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부산을 배경으로 한 2부다. "펜션에서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됐을 때 '이 두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면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길이도 나름의 고충이 있고 저도 저만의 어려움이 있는데 그걸 너무 징징대지 않으면서 조금 웃기고 쓸쓸하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마침 김오키 감독님이 부산 공연을 잡으셔서 '그럼 부산에서 이어가볼까?' 했고 거기서 2부의 구성이 나왔죠"
영화 속 부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제로 부산에 거주하는 뮤지션들이다. 타로를 봐주는 사람도, 공연장에 서는 연주자도 모두 색소포니스트인 김 감독의 인맥으로 섭외된 실제 음악가들이다. 대사도 철저히 즉흥이었다. "배우분들께는 '이런 상황이고, 이런 류의 말을 해주면 좋겠다' 정도만 설명했어요. '이 문장을 그대로 말해 주세요'는 못 하겠더라고요. 원래는 제가 글을 써서 대본을 드리는 게 맞는 과정인데, 이렇게 말로만 부탁하는 게 좀 죄송했거든요? 그런데 다들 너무 재밌어하시면서 말도 만들어주시고 장면도 같이 그려주셨어요. 김충길, 김무건 배우 말고는 대부분 비전문 배우인데, 덕분에 현장은 오히려 더 순탄했어요"
그렇게 쌓인 장면들을 나열해보니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 보였다고 한다.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과 상황들이 어느새 '운명'이 되는 과정이다.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졌거든요. 나중에는 '혹시 이런 우연들이 나의 운명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현경과 충길이 입고 있는 티셔츠도 우연의 결과물이다. 이 티셔츠는 '하나, 둘, 셋, 러브' 영화 속에서 유튜버로 나오는 김의성이 그려진 이 티셔츠는 관객에게는 하나의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저 각자 잠옷으로 가져온 옷이었다. "처음엔 그 티셔츠를 활용한 장면이 아예 없었어요. 근데 촬영장에 가보니 저도, 충길 씨도 집에서 잠옷으로 입던 같은 티셔츠를 들고 온 거예요. 대사에도 나오지만 옷 질감이 진짜 좋거든요(웃음). '이건 써야 한다' 싶어서 급하게 장면을 만들었고, 영화 안에서 반복되는 상징처럼 쓰이게 됐죠. 그것조차 너무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찍으면서 좀 소름이 돋았어요"
'고백하지마'라는 제목 역시 우연과 농담에서 비롯됐다. ‘하나, 둘, 셋, 러브’에서 이미 여러 번 고백했던 충길, 그리고 실제 배우가 만든 노래 중 하나가 바로 '고백하지마'다. "충길이가 쓴 노래 중에 '고백하지마'라는 곡이 있어요. 제가 그 노래를 원래 좋아했거든요. 근데 충길 씨가 '이 영화 제목은 고백하지마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찍은 장면이랑도 너무 잘 어울려서 그대로 가져왔죠. 제목도 결국 충길이에게서 나온 거예요"
영화 속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크게 갈리는 장면 중 하나는 무건이 충길에게 고백하는 순간이다. 시사회에서도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던 장면인데, 사실 류현경이 이 장면에 담고 싶었던 감정은 단순한 개그 코드가 아니다. "웃기려고 만든 장면은 아니에요. '하나, 둘, 셋, 러브'에서 무건 씨가 계속 사주를 봐주는 인물인데, 충길이가 현경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사주 봐줄까'라고 물어보는 장면을 넣고 보니 '혹시 무건이도 충길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는 상상을 하게 됐고,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고백 장면이 한 번은 나와야겠다 싶었어요"
영화 속에서 무건도 결국 충길에게 마음을 건네지만 온전히 받아주지 못하고 실연의 아픔을 공유하는 둘은 울며 포옹한다. 류현경은 이 씬을 '1부의 중요한 좌절 포인트'라고 표현했다. "현경과 충길, 그리고 충길과 무건. 서로에게 고백은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들이 겹쳐져 있어요. 저는 그 장면이 세 사람이 겪는 좌절과 쓸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관객은 웃을 수 있고, 어떤 관객은 마음이 짠할 수 있겠죠. 남도영화제에서 상영할 당시에는 그 장면에서 훌쩍이시는 분도 계셨어요. 다 취향과 관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2부에서 무건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류현경 역시 이 지점에서 조금의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 보니까 '무건이와 충길이가 마지막에 한 번 더 만나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근데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다시 찍기 어렵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럼 이건 2편으로 찍자'하고 웃으면서 넘겼어요"
부산 강연 장면에서 관객이 휴대전화 번호를 묻는 대목에 대해서도 '지금 보니 조금 이상하더라'며 웃었다. "인스타 맞팔은 안 한다고 하면서 번호는 선뜻 주는 게, 지금 다시 보니까 약간 오류가 있는 것 같긴 해요. 실제 저는 번호를 달라고 하면 왜인지 한 번 묻긴 하는데, 별일 없겠다 싶으면 그냥 드리는 편이거든요. 오히려 그쪽에서 전화를 잘 안 하시더라고요(웃음). 현경이 부산까지 내려와 허무한 상황을 겪은 뒤 '그래도 공연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번호를 건넸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이해가 좀 되지 않을까요"
ⓒ 류네
촬영 현장은 우연과 즉흥, 즐거움이 가득했지만 진짜 고생은 그 이후였다. 후반 작업만 8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편집본을 봤을 때는 아쉬운 게 한 80%였어요. 초반 펜션 장면 보면 다들 핸드폰을 옆에 두고 있거든요. 그게 다 아이폰 녹음기예요. '녹음 버튼 눌러', '녹음해' 이러면서 각자 녹음을 했고 그 파일들을 다 메일로 받아서 소리를 맞췄어요"
문제는 자신의 핸드폰뿐 아니라 타인의 녹음 기록까지 찾아야 했다는 점이다. "제 폰에 있는 건 그래도 쉽게 찾는데 다른 분들 폰에 녹음해둔 건 '소스 하나라도 건져야 해요'라며 파일을 같이 찾았어요. 그런 식으로 잘라 붙이고 비는 부분을 메우고 계속 꿰매는 작업이었어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싶은 순간도 있었죠. 그런데 결국 재밌으니까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완성된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까지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여러 배급사를 만나야 했고 그 중 한 곳에서 '유튜브 스트리밍을 통해 송출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는 제법 큰 충격을 받았다. "서독제(서울독립영화제)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관객분들이 정말 좋아해 주셨어요. 같이 웃고, 또 각자 다른 감정들도 느끼고요. 그걸 경험했는데 자신들의 유튜브 채널에 스트리밍 형식으로만 올리고 싶다고 하셔서… 그 말을 듣는데 뭔가 마음이 덜컥 내려앉더라고요"
류현경은 이 일을 계기로 '직접 배급을 해보자'는 결론에 다다랐고 그렇게 1인 배급사 '류네'가 탄생했다. "한국에서 영화 개봉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 잘 알거든요. 그렇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걸 너무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극장에서 못 보게 되는 게 너무 서운하고 슬프다는 마음이 더 컸어요. 그래서 알음알음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심의 등급 받는 법부터 DCP 파일 만드는 것까지 하나씩 배우면서 '류네'를 만들었어요"
그에게 가장 설레는 순간은 포스터를 말아 들고 극장을 찾아갈 때다. "독립극장 같은 곳들은 아직도 지류 포스터를 걸어주시니까 제가 직접 배달을 했어요. 포스터를 돌돌 말아서 들고 가는데 그 순간까지 계속 설레는 거예요. 매표소에 맡기고 나서도 혼자 신기해했어요. 주변에서 다들 너무 힘든 일 아니냐고 하시는데 저는 '어떻게 이런 설레는 일을 내가 하고 있지' 싶어서 재밌었어요"
류현경에게 영화 만들기란 그저 촬영과 편집의 과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촬영하고 편집하는 것만이 영화 만드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극장에 걸리게 만들고 관객분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까지 이 모든 과정이 다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혼자 일하고 있지만 배급·마케팅, 극장 운영하시는 분들, 지브이(GV)에 와주는 배우들까지 다 같이 영화를 만드는 분들이라고 느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류현경이 사람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데, 정작 본인은 "이게 약간 유전인 것 같다"며 웃었다. "저희 외할머니, 엄마, 이모… 다들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얘기가 있어도 금방 잊어버리세요. '맞다, 걔 그랬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다 까먹어요(웃음). 저도 좀 그런 편인 것 같아요.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죠. 그래서 사람을 잘 믿기도 하고, 또 너무 좋아하기도 하고요. 특히 같은 일을 하는, 연기하고 영화 만들고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정말 좋아해요. 상처를 받아도 결국엔 까먹어서 회복탄력성이 좋은 편이에요"
그에게 '사랑'은 남녀의 로맨스를 넘어선 더 큰 감정이다. “나는 솔로, 환승연애 같은 프로그램은 웬만하면 다 챙겨봐요. 특히 20대 초중반 친구들이 나오는 시즌을 보면 '맞아, 저때는 진짜 저게 전부였지'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감정이 너무 귀엽고 또 재밌어요. '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면서 혼자 같이 설레는 느낌이 좋아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남녀 사이의 사랑뿐 아니라 친구 사이, 가족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이요. 그게 없어지면 안 되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아마 그래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순간들을 담는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아요"
사실 연출에 대한 꿈은 이번 작품으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중학교 시절 이미 단편영화를 제작했고 대학교에서도 연출 전공을 통해 단편과 뮤직비디오를 꾸준히 찍어왔다. "어릴 때부터 '이런 거 찍으면 진짜 재밌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연기에 대한 갈망이 훨씬 커진 거예요. 연기를 너무 잘하고 싶고, 평생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앞선 거죠. 그러다 보니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있어도 '지금은 연기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눈치 보고 못 찍고 넘어간 것들이 너무 많아요"
류현경이 '고백하지마'를 만들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그때 그냥 찍어볼 걸' 하는 아쉬움이었다. "지나고 나니까 아깝더라고요. 그때 그냥 핸드폰으로라도 찍어놨으면 그게 나중에 어떻게 쌓여서 영화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근데 제가 너무 소심하게 안 하고 있었던 거죠. 이번 영화는 '하고 싶으니까 하자'라는 마음에서 출발했어요. 앞으로도 뭘 만들든, 연기를 하든 그냥 눈치 보지 말고 '지금 하고 싶으면 하는 게 맞다'는 마음이에요"
이미 다음 프로젝트도 한창 준비 중이다. 남녀 두 사람의 긴 연애 연대기를 담은 오래된 시나리오가 출발점이다. "정말 오래전부터 조금씩 써온 시나리오예요. 남자와 여자의 연애 연대기 같은 이야기인데 시간의 흐름이 길게 들어가 있어서 촬영 분량도 많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제작자·투자자를 모으는 중이고요. 쓰는 동안 정말 힘들었는데, 또 너무 재밌더라고요. '싫은데 좋은' 이상한 감정 있잖아요(웃음). 그런 감정이 영화에 투영되지 않을까 싶어요"
감독으로서의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동시에, 배우 류현경으로서의 행보도 이어진다. 내년에는 유재명, 정성일이 함께 출연하는 스릴러 영화 '사피엔스'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이 작품을 위해 머리도 과감히 자르며 새로운 얼굴을 준비 중이다. "연출과 연기를 딱 나눠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은 작품이 있다면 연기도 계속하고 싶고 동시에 제가 쓰고 찍는 영화들도 꾸준히 만들고 싶어요. 또 언젠가는 제가 정말 극장에서 보고 싶은 한국 독립영화를 '류네'를 통해 배급하는 것도 계속하고 싶고요. 의뢰를 해주실지 제가 선택할지는 그때 가서 판단해야겠지만요(웃음)"
마지막으로 '고백하지마'를 어떤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러닝타임이 1시간 10분 정도라 짧은 편이에요. 그래서 관객분들이 너무 큰 마음의 준비를 하기보다는 연말에 가볍게 산책하듯 극장에 들른다는 느낌으로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대신 보고 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한켠에 조금 쓸쓸함이 남았으면 좋겠고요. '나도 저런 적 있었지' 혹은 '나도 저럴 수 있을까' 같은 생각들이요. 거창하고 딥한 사건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즐기면서도 은근히 오래 떠올랐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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