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밤과 전쟁의 현실 사이, 벌어진 간극
2026년 3월 1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개최된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화려한 턱시도와 드레스가 수놓은 축제의 장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미국과 이란 사이의 일촉즉발 전쟁 위기, 가자지구 전쟁의 장기화,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과 마두로 대통령 체포, 그린란드 매입 발언, 반(反)이민 시위대의 비극적 사망 사건 등 날 선 현실 정치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자파르 파나히·하비에르 바르뎀·파벨 탈란킨 ⓒ뉴시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끌어올린 목소리는 시상식 전반에서 결코 다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발언들은 일부 인물에 한정됐고, 무대 위 발언들은 직설적인 비판보다는 예술가의 책임과 미래 세대에 대한 부채감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국제장편영화상 시상자로 무대에 오르면서 가슴에 '전쟁 반대(No a la Guerra)'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등장했고, 작품상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각색상 수상 소감에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남겨주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센티멘탈 밸류'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도 "모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말자"라며 사회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상자로 오른 지미 키멀은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며 "아다시피 어떤 국가의 지도자는 언론의 자유를 지지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인지는 말할 수 없다. 북한과 CBS만 언급하겠다"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날 시상식에서 현실을 가장 정면으로 응시한 것은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푸틴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의 파벨 탈란킨 감독이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종식을 촉구하며, 이 시상식장의 어떤 발언보다 직접적으로 현재의 세계를 가리켰다.
아쉬운 지점은 정작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시상식의 중심에서 비켜섰다는 사실이다. 올해 작품상 및 국제장편상 후보군에는 가자지구 전쟁 속 고립된 여섯 살 소녀와의 전화 통화를 담은 '힌드의 목소리', 전쟁이 확대되며 위협받는 세계를 그린 '시라트', 국가 폭력의 상흔을 비극적 코미디로 풀어낸 '그저 사고였을 뿐'처럼 전쟁과 억압,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요 수상 및 언급에서 밀려났다.
특히 작품상을 받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미국 정치 권력을 비판하는 영화임에도, 수상 소감에서는 그 문제의식이 거의 확장되지 않았다. 앤더슨 감독이 "아이들에게 엉망진창이 된 세상을 남겨준 것에 대한 미안함"을 언급하긴 했지만, 이는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국제 정세를 직접 호명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치적 영화를 선택했지만, 정치적 발언은 최소화한 셈이다.
이 간극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상황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이란의 거장인 그는 '그저 사고였을 뿐'으로 국제장편영화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시상식이 끝난 직후, 그는 이란으로 돌아가 1년 징역형을 복역해야 한다. 이란 정부로부터 반정부 선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그에게는 형기 외에도 2년간의 출국 금지 처분까지 내려진 상태다. 화려한 조명 아래 배우와 감독들이 축배를 드는 동안, 같은 시상식에 이름을 올린 한 감독은 레드카펫이 끝나는 순간 자유를 박탈당하는 현실로 돌아가야 했다.
스크린 속에서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들이 던져졌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 질문이 끝까지 확장되지 않은 셈이다.
이에 버라이어티는 "시상식을 봤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지금 미국 정치의 어떤 현실을 다루는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라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오늘날 미국 정치를 영화의 DNA 핵심으로 삼은 작품인데, 이날 밤 여섯 개 오스카를 가져가는 동안 그 현실이 승리의 축하 전면에 나왔어야 했다"라고 꼬집었다.
알자지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비자 금지령으로 인해 이란과 팔레스타인 영화인 일부는 아예 시상식장에 입장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짚으며 할리우드가 저항을 소비하는 방식과 실제 저항의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이날 밤처럼 선명하게 드러난 적도 드물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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