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내리고 밤 올린 49년 만의 개편…24시간 가동 산업 '냉담'
"탄소중립 위해 전기 쓰라더니 요금 벌칙" 탄소 역설에 신음
양대 노총 이례적 연대 "제조업 뿌리 흔드는 안보 위기 직면"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 야적장에 철강제품이 쌓여 있는 모습.ⓒ뉴시스
“탄소 감축을 위해 화석 연료 대신 전기를 택해도 돌아오는 건 비용 부담뿐입니다.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는 기업에 오히려 짐을 지우는 셈 아닙니까.”
정부가 49년 만에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를 ‘낮은 싸게, 밤은 비싸게’로 전면 개편하면서 국내 기간산업 현장에 탄소중립의 역설이 몰아치고 있다. 태양광 발전량이 풍부한 낮 전기를 쓰라는 취지지만 1년 365일 고로(용광로)를 식힐 수 없는 철강업계에서는 현실을 무시한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탄소 감축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짊어진 기업들이 오히려 가중되는 에너지 비용에 직면하며 미래 경쟁력을 위한 투자 재원마저 바닥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낮 요금 인하 혜택 '그림의 떡'…친환경 전환할수록 부담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전력이 발표한 개편안은 전기료가 가장 비싼 ‘최대부하’ 구간을 낮 시간대에서 오후 6~9시 밤 시간대로 옮긴 것이 골자다. 이는 태양광 발전량이 쏟아지는 낮 시간의 전력 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맞춰 가격 신호를 정상화하려는 포석이다. 정부는 이번 조치로 산업용(을) 전력을 사용하는 사업장의 97%인 3만8000여곳이 요금 인하 효과를 볼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24시간 연속 공정이 필수인 철강과 석유화학 등 업종의 시각은 냉담하다. 원료 투입부터 제품 생산까지 전 공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장치 산업 특성상 특정 시간대에만 가동률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다. 결국 낮 시간 인하 혜택은 누리지 못한 채, 그간 원가 절감의 보루였던 심야 경부하 요금 인상분(킬로와트시·kWh당 5.1원)만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대형 철강사의 경우 전력 단가가 1원만 올라도 연간 수백억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미래 전략과의 충돌도 불가피하다. 현재 철강업계는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기존 고로를 전기로로 교체하고 궁극적으로는 전기를 대량 소비하는 ‘수소환원제철’ 도입을 추진 중이다. 화석 연료 대신 전기를 선택할수록 전기료 인상이라는 결과로 돌아오는 셈이다.
개편안은 다음 달 16일부터 적용된다. 유예를 신청한 기업은 9월 30일까지 기존 요금제를 적용받을 수 있으나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업계는 기간산업의 연착륙을 돕는 ‘핀셋 지원’과 탄소 중립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기술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기로-고로 복합프로세스에 사용되는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전기로 사진.ⓒ현대제철
양대 노조 “제조업 연쇄 충격”... 대외 위기 속 전기료 변수
현장의 절박함은 경쟁 관계였던 양대 노총마저 하나로 묶었다. 철강업계 1·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노조(한국노총·민주노총)는 지난 19일 사상 처음으로 국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산업용 전기요금 부담 완화와 탄소배출권 제도 개선, 수소환원제철 기술 전환 지원 확대를 강력히 촉구했다.
김성호 포스코노조 위원장은 “철강은 방산·자동차·조선 등 핵심 산업을 지탱하는 기반으로, 붕괴 시 제조업 전반의 연쇄 충격이 불가피하다”며 “지금의 위기는 단순 경기 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뿌리를 흔드는 국가 안보의 위기이며, 마지막 골든타임을 넘기면 돌이킬 수 없다”고 성토했다.
송재만 현대제철지회장 역시 “전기료 부담 완화와 친환경 전환에 대한 국가 지원 확대는 더 늦출 수 없는 생존의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노총 금속노련 포스코노조와 민주노총 금속노조 포항지부 현대제철지회가 19일 국회 소통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철강 산업 위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포스코노조
정치권도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박상웅 의원(국민의힘)은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이 저탄소 공정으로 전환할 때 국가가 실질적인 예산을 지원하는 ‘환경친화적 산업구조 전환 촉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내 용광로 11기를 수소환원제철 공정으로 바꾸는 데 약 47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지만 현재 정부의 실증 사업 국비 지원액은 3088억원에 불과한 실정을 고려한 조치다.
특히 업계가 이번 개편을 유독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중국발 공급 과잉과 중동 정세 불안이라는 복합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원가 상승 압력이 거세지는 가운데 전기료까지 구조적 인상 궤도에 오를 경우, 자력으로 실적을 회복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상황이다. 업계는 유가 급등과 전기료 인상의 상관관계가 중기적인 변수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권지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유가 상승이 철강사에 미치는 복합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원가 부담과 판가 인상의 명분을 동시에 작동시킨다”면서 “3개월 내 진정되면 가격 전가 시도 쪽에 무게가 실리지만, 반년 이상 이어지면 산업용 전기요금의 구조적 인상으로 전력 의존도가 높은 전기로사의 실적은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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