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대변인은 당 공식입장 전하는 자리
개인 의견 치부하는 건 정치도의 저버린 행위
참을 만큼 참았지만 더는 못 참았다. 청와대가 12일 그간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정부 출범 후 4개월여 동안 야당의 정부조직법 처리 지연도, 인사를 둘러싼 비판도, 국가정보원과 NLL(북방한계선) 논란을 둘러싼 사과 요구도, 대선 불복도, 대통령 정통성 시비도, 여기에 온갖 막말과 비난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며 참아왔지만 ‘귀태(鬼胎)’ 발언만은 참지 못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지난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갖고 지난해 출간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라는 책을 인용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를 ‘귀태’로 표현했다. 귀신 귀(鬼)에, 태아 태(胎).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홍 대변인은 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를 ‘귀태의 후손’이라 칭했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고, 아베 총리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의 후손,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소리다.
정치권 인사들의 막말은 기존에도 수없이 있어왔다. 최근 민주당 고위 당직자는 박 대통령을 ‘당신’으로 지칭하고, 남재준 국정원장을 ‘미친X’으로 표현했다. 새누리당은 ‘NLL 포기’ 논란을 두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반역의 대통령’으로 표현하면서 이적행위자로 몰아세웠다.
발언의 출처가 당의 공식행사인 경우도 있고 사석인 경우도 있다. 이들 발언도 당시엔 문제가 됐지만, 당 차원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진 않았다. 당사자들이 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발언 자체도 지극히 개인적인 의사 표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에 규정된, 또 국민투표로 선출된 입법기구다. 따라서 모든 의원의 발언이 당의 입장은 아니다. 이는 당과 개인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보통의 막말과 결이 다르다. 문제는 첫째, 대변인이라는 직책은 당의 입장을 전하는 자리고 둘째, 발언의 출처가 당의 공식 브리핑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귀태라는 단어는 박 대통령의 정통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다.
하루종일 국회를 공전시킨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결국 12일 오후 “브리핑 과정에서 부적절했던 발언에 대해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책임을 느끼고 원내대변인직을 사임하도록 하겠다”며 원내대변인직을 사퇴했다.
민주당이 그토록 하려했던 국정원 국정조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 고발조치 등을 파행시키면서까지 하루종일 버티다 끝내 모든 것이 공전된 이후에나 나온 사퇴였다.
이와 관련,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김관영 민주당 수석대변인을 통해 “우리당 공보담당 원내부대표의 어제 발언은 보다 신중했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감”이라면서 “국정원 국정조사 등 모든 국회 일정이 정상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홍 대변인의 발언이 전적으로 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모욕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본다.
홍 대변인은 외조부의 역사를 부정하는 아베 총리와 부친의 역사를 부정하는 박 대통령 간 유사점을 설명하기 위해 책을 인용했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역사는 전쟁과 한반도 식민지배이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는 5.16 군사정변과 정보기관을 통한 정치개입이다.
홍 대변인은 두 정상이 조상이 걸었던 길까지 따르려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박 대통령은 유신국가 회기를 꿈꾼다는 소리다. 납득은 어렵지만 문맥은 이해가 된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열람 등 원내 굵직한 현안들과 관련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야권에 비판의 소지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정도를 벗어난 표현의 방식과 발언의 수위까지 정당화할 수준은 아니다.
이와 관련, 한 정치전문가는 “이번 사태는 야권이 잘 되길 바라는 입장에서 봐도 대변인이 무조건 잘못한 것”이라면서 “앞으로는 민주당이 대변인이 해야 할 말과 해선 안 되는 말을 자체적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에도 공동책임이 있다는 설명이다.
국회의원 개인은 지역구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국민의 대표지만, 정당은 아니다. 정당은 국회의원과 당원, 이해당사자가 결집된 합의기구다. 대변인은 이런 정당의 입장을 대표해 발언하는 사람이다. 민주당이 이번 사태를 홍 대변인 개인의 문제로 내버려둘 수 없는 이유다.
과거 야당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민주당 의원들이 가장 잘 알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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