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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언제부터 오른쪽 눈 감았나


입력 2013.11.11 09:16 수정 2013.11.12 12:02        이충재 기자

<교과서 논란 어디로 가나 ①>87년 5차 준거안 시발

이인호 교수 "반공정책이 빌미 줘" 민중사학 휩쓸어

“교과서 좌편향의 뿌리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한 민중사학에 있다.”

‘역사 교과서 전쟁’은 최근에 시작된 논란이 아니다. 교육부가 최근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에 잘못 기술돼 수정·보완해야 할 내용이 무려 829건에 달한다고 발표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오자 등 작은 실수가 아니라 오래된 관성으로 한쪽 눈을 감고 역사를 써온 편향성에 있다는 지적이다. ‘외눈박이 사학’의 역사는 뿌리 깊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반미 친북 반재벌’의 시각으로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학생들의 손에 들리게 된 배경엔 ‘민중사학’이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체로 거르지도 않은 채 교과서에 담아내고, 분단의 책임이 남쪽에 있는 것처럼 서술해 교육부의 수정 권고를 받기도 했다. 편향된 역사 인식이 학생들에게 주입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민주화 봄바람' 타고 '역사학계 편서풍' 확대되기 시작해

역사학계가 외눈을 뜨게 된 배경을 짚어보기 위해선 굴곡진 역사를 거쳐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0년대 초 군사정부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차원에서 전반적인 교육개혁을 시도했다. 정부는 교육개혁안의 하나로 1981년 12월 새 교육과정을 제정했고, 1982년에는 제4차 교육과정에 따라 국사 교과서 개정이 이뤄졌다.

제4차 국정 국사 교과서는 현대사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 교과서를 2권으로 분리했고, 역사발전 과정을 우리 민족의 능동적인 입장에서 살피고, ‘시련과 극복’ 중심의 근현대사 교육이 강화됐다.

하지만 이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초래된 시련’과 ‘지배층이 주도하는 극복’만을 강조함으로써 반공체제와 독재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려고 했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 ‘자업자득’이라고 했다. 군사정권 시절에 통제했던 좌파운동-세력의 뿌리가 민주화 이후 급속도로 역사학계에 뻗어 내리면서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빌미를 준 것이 반공정책이었다”고 했다.

실제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면서 민중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현행 국사교과서 흔들기에 돌입했다. 동시에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에 편승해 역사학계는 ‘새 역사쓰기’를 시작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작용이 강단 세력의 쏠림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출발점이다.

"1987년 제5차 준거안, 좌편향 교과서가 되는 시발점이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반작용은 역사학계의 시각을 틀어놨고, 1987년 3월에 개정-공포돼 1989년부터 적용된 제5차 교육과정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특히 1987년 6월 5일에 확정발표된 제5차 준거안은 그 전과는 다른 방향의 해석을 역사 교과서에 담도록 했다.

우선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를 교과서 준거안에서 처음으로 사용했고, 건국 이후의 국사교과서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를 서술하도록 했다.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에서 “제5차 교과서 편찬의 준거가 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은 우리나라 국사교과서가 오늘날과 같이 좌편향 교과서가 되는 시발점이었다”고 지적했다.

1987년 7월 김영삼.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이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석방되는 시국관련 혐의자들을 맞이하고 있다.ⓒ연합뉴스

정 위원은 준거안에서 사용된 ‘일제강점기’가 “북한이 만들어 내 용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라고 부르고, 그 이후를 ‘미제강점기’라 부른다. ‘미군강점’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강제점령의 준말로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남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당한 ‘미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역사 해석이다.”

정 위원은 “‘일제강점기’가 ‘미제강점기’와 짝을 이루는 북한의 조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사용했다면,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인식하는 북한의 역사 해석에 동조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국사학계가 북한의 역사서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북한식 역사해석’을 접목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정 위원은 “국사학계 일각에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 역사서와 역사 해석을 접하면서 북한 학자들의 유물론적 역사 해석을 상당부분 수용해 왔다”며 “그 결과 북한에서 유입된 역사해석이 우리나라 국사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준거안의 지침대로 제5차 국사교과서에서는 ‘통일을 위한 노력’이라는 절에서 처음으로 북한의 역사가 서술되기 시작했다. 이후 국사 교과서에서 북한 관련 역사 서술의 비중은 점점 더 커졌다.

정 위원은 북한의 역사가 우리 교과서 안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에 대해 “제5차 준거안을 작성한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의 성향 때문”이라며 “조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민중사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했다.

또 “조 교수는 북한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민족 공동의식을 유지하는 불가결의 조건이고, 분단 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북한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민족의식을 유지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게 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뿌리 내리기 시작한 '민중사학'…"사실 아닌 통일 목표로 역사 서술"

‘민중사학’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서 시작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현실 모순에 대한 인식을 자양분으로 자라났다. 무엇보다 역사학계에 큰 변화를 가져와 진보좌파 세력이 뿌리내리 내릴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이인호 교수는 “이들은 역사교육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좌파학자들이) 교과서 집필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정 위원은 “1980년대 초반 역사학자 중 진보좌파 성향의 연구자들이 기존의 역사연구를 비판하면서 민중사학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며 “이들은 현실변혁과 분단의 자주적 극복을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할 변혁의 주체로 민중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민중사학자들의 역사 연구 및 기술의 문제점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민중사학은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이 접목되어 나타난 것이다.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상과제로 삼는 까닭에 민중사학자들의 한국현대사에 대한 인식은 결정적인 결함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술한다는 역사학의 근본 목표로부터 크게 벗어남으로써 역사학을 명분이나 염원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 위에 올려놓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통일이란 염원을 향해 역사연구의 초점을 맞춰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연구자의 희망에 따라 곡해할 위험성이 있다.”

민주화 이후 소장학자들이 현대사 연구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연구풍토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들의 이념 좌표설정 과정은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우파학자들이 지적하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민중사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사학자들이 1970~80년대 민중사학론을 제창한 주역들이 저술한 책들을 주로 읽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낸 세대라는 점이다.

원로사학자인 강만길 교수가 쓴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분단극복의 역사관을 제시해 당대에 큰 호응을 받았고,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등은 사학계 사상의 수원지로 평가됐다. 그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물결이 1980년대 후반에 폭발한 민주화와 함께 역사학계에 큰 파고를 만들었다. <계속>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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