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의 조국,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품다
<유럽에 미치다⑥-체코 프라하2>'유럽의 음악학원' 천천히 걷기
1946년 5월 12일 체코 프라하 중심에 위치한 오베츠니둠(시민회관). 그곳에서도 가장 큰 연주장인 스메타나홀 무대 중앙에 선 32세의 라파엘 쿠벨리크.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인 그는 비장한 마음으로 지휘봉을 꼭 쥐었다. 그리고 지휘봉이 허공을 가르자 비장한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중 1번 ‘비셰흐라드’다. 스메타나 본인이 영면하고 있는 그곳을 그린 이 음악이 시작되면서 역사적인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44년을 건너 뛰어 1990년 5월 12일. 같은 장소, 같은 오케스트라 앞에선 76세의 쿠벨리크는 조국 체코를 떠났던 42년의 세월을 회상하며 다시 힘주어 지휘봉을 쥔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1번 ‘비셰흐라드’에 이어 2번 ‘불타바’에 이르러 그의 이마에 이미 땀이 송글하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 강렬하게 타오른다. 왜 이토록 사랑하는 조국을 42년씩이나 떠나 있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지배에서 겨우 벗어났나 했더니 이내 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된 조국. 그리고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없어 눈물로 옷을 적시면서 영국 런던 망명길에 올랐던 쿠벨리크. 그는 벨벳 혁명으로 민주화를 이룬 조국에 42년 만에 돌아와 44년 전 자신이 시작했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 무대에 다시 선 것이다.
1000만 명이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 그러나 1년에 외국 관광객만 1억 명이 넘는 나라. 쿠벨리크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름다운 나라 체코는, 쿠벨리크의 정신적인 스승이자 음악혼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스메타나가 먼저 사랑하고, 먼저 투쟁하던 나라다.
1824년 맥주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음악에 빠져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스메타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신음하며 자기 말인 체코어 대신 오스트리아의 말인 독일어를 쓰며 음악 공부를 해야 했던 스메타나도 쿠벨리크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1848년 30년 전쟁의 종전과 프랑스 파리 2월 혁명의 여파로 전 유럽의 젊은이들이 민족주의에 눈을 뜰 무렵 스메타나도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던 학생 노동자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유럽의 음악 황제로 불리는 리스트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한참 음악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그러나 스메타나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고, 결국 조국을 등지고 스웨덴 예테보리로 도망을 쳐야 했다. 하지만 스메타나의 망명 생활은 쿠벨리크 만큼 길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힘이 현격히 쇠약해지기 시작할 무렵인 1861년 조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음악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불운했다. 오페라 ‘팔려간 신부’로 이른바 체코의 ‘국민 작곡가’가 됐지만 1874년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작곡을 시작했을 때부터 청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1번 ‘비셰흐라드’로 시작해 2번 ‘불타바’, 3번 ‘샤르카’, 4번 ‘보헤미아의 숲과 초원에서’, 5번 ‘타보르’와 6번 ‘블라니크’를 완성한 스메타나는 1884년 5월 12일 청력도 잃고 정신착란증까지 앓으면서 프라하의 한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그리고 그를 62년 만에 다시 살려낸 것이 쿠벨리크다. 그렇다. 쿠벨리크가 시작한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는 바로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 시작한다. 유럽에서 잘츠부르크 음악축제와 더불어 가장 크고 유명한 음악축제는 체코 민족주의의 상징인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 연주로 시작해 6월 1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체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소개한 바 있는데, 사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명칭은 1968년 혁명보다 22년이나 이전인 1946년 처음 열린 국제음악제의 명칭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종전으로 독일의 압제에서 벗어난 후 라파엘 쿠벨리크가 자신이 상임 지휘자로 있던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창단 50주년을 맞아 스메타나의 기일에 맞춰 처음 음악제를 열었던 것이다.
우아한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오베츠니둠이라고도 불리는 프라하 시민회관. 1912년 프라하 시민들의 성금과 알폰소 무하, 카렐 슈필라, 얀 프라이슬러 등 당시 체코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동참으로 만들어졌다. 시민회괸에서 가장 큰 공간이 바로 스메타나 홀이다. 1918년 10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장소이기도 하다.
스메타나홀에서는 1년 365일 쉬지 않고 클래식 음악 연주회가 열린다. 프라하를 일컬어 ‘유럽의 음악학원’이라고 하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프라하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고품격의 연주회를 느낄 수 있다. 그것도 우리 돈으로 1만5000원 남짓으로. 사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도 2만원 남짓의 클래식 공연을 볼 기회는 있다. 다만 어지간한 시력을 지니지 않고는 연주자의 얼굴을 볼 수는 없다. 2층이나 3층의 아주 먼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좀 앞자리로 오려고 하면 최소 10만원에서 심지어는 30만원까지 값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체코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공연장인 스메타나홀은 어지간한 연주회의 경우 좌석에 따라 가격이 차등으로 적용되는 일이 없다. 조금의 시간만 더 투자한다면 1만5000원 정도로도 맨 앞자리에서 연주자들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멋진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다.
스메타나 외에도 안토닌 드보르작과 레오시 야나체크 등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들도 있지만 프라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음악가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빼놓을 수 없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으로 빈에서 주로 활동했던 모차르트가 프라하와 무슨 인연? 빈의 귀족들과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모차르트는 말년이나 다름없는 31살 때인 1787년 나빠진 건강을 달래기 위해 풍광이 아름답고 물이 맑기로 유명한 프라하에서 요양을 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프라하 시민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특히 프라하의 갑부인 노스티츠 백작은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고, 일생의 환희였다. 그래서 그는 모차르트에게 엄청난 돈을 퍼부으며 돌보았다.
프라하 시민들의 그런 열화와 같은 성원에 모차르트는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 ‘돈 조반니’를 작곡했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 스타보브스케 극장(에스타테스 극장이라고도 불림)에서 역사적인 초연했다. 물론 지휘도 모차르트 본인이 했고, 직접 극중 피아노 연주까지 하는 최고의 서비스를 선사하면서.
그날 이후 프라하에는 새로운 수식어가 생겼다. ‘돈 조반니의 도시’. 그래서 프라하 시민들은 모차르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한다. 노스티츠 백작과 프라하 시민들은 돈을 모아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얼굴 없는 유령’이라는 청동상을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차르트에게 선물했다. 모차르트는 청동상을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가져가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워 당시의 운반수단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청동상을 다시 스타보브스케 극장에 기증했다. 영악한 프라하 시민들은 모차르트에게 선물도 하고, 그 선물을 자신들이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주 후일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는 이 청동상을 그대로 모방한 모작을 만든다. 하지만 결국 진품은 프라하에 그대로 남은 셈이다.
노스티츠 백작이 세운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1984년 아카데미 8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 ‘아마데우스’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다. 체코 출신인 감독 밀로스 포먼은 실제 무대인 빈이 아닌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찍은 것이다. 거의 200여년 전 프라하 시민의 모차르트에 대한 애정이 밀로스 포먼에게서 재현됐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스타보브스케 극장은 1년 중 거의 대부분을 오페라 ‘돈 조반니’ 공연으로 채운다.
프라하를 특별히 사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프라하를 빛내는데 힘을 보태고 있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음악가가 있다. 바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가의 이름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여럿이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 ‘음악의 어머니’ 헨델,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 ‘유럽 음악의 황제’ 리스트 등등. 그런데 이 수식어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다. 독일이나 영국에 가서 바흐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수식하면 공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나 유럽에서나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수식어가 있다. ‘악성(樂聖)’ 베토벤이다. ‘음악의 성인’이라는 뜻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베토벤의 이름 앞에 늘 붙는 수식어다.
그런데 독일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활동했던 베토벤이 왜 프라하를 사랑했고, 또 프라하의 자랑거리가 됐을까? 합스부르크 치하의 유럽에서 음악가는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활동을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유명 작곡가들은 주로 귀족들을 위해 작곡과 연주를 했다. 그런데 유독 그런 환경을 싫어했던 이가 베토벤이다. 그는 귀족들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궁핍함을 면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베토벤에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귀족이 아닌 체코 프라하의 귀족인 로브코비츠 가문이 접근을 했다. 그리고 이 가문은 베토벤을 전폭적으로 후원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음악이 아닌 베토벤 본인을 위한 음악을 하라고 권했다. 이에 부응한 베토벤은 그의 위대한 교향곡들을 작곡했고, 기꺼이 3번 영웅, 4번 전원, 그리고 9번 합창 교향곡을 로브코비츠 가문에 헌정했다. 프라하성 내에 위치한 로브코비츠 궁전엔 바로 그 교향곡들의 원본 악보가 전시돼 있다.
프라하 성 아래쪽으로 가다보면 평범한 주택가의 골목길에 베토벤의 얼굴이 부조된 건물을 볼 수 있는데, 그의 나이 26살 무렵인 1796년 경 베토벤이 잠시 머물면서 작곡에 몰두했던 집이다. 지금은 일반인들의 평범한 집이지만 프라하의 여행자들이 베토벤의 작은 흔적 하나를 보자고 숱하게 몰려드는 명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베토벤과 프라하가 짝사랑이 아닌 교감의 사랑을 200여년 이어온 보람은 ‘프라하의 봄’ 국제음악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축제를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 연주로 시작해 드보르작이나 야나체크가 아닌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으로 축제를 마무리 한다는 것만 봐도 체코와 프라하가 얼마나 베토벤을 사랑하는 지 알 수 있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도시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를 팔아먹고 사는 곳이라면 프라하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팔아먹고 산다. 스타보브스케 극장이 연중 내내 오페라 ‘돈 조반니’를 공연하는 것과 별도로 마리오네트 인형극 ‘돈 조반니’는 이미 프라하를 가장 대표하는 문화 상품이 돼 있다. 오로지 인형극 ‘돈 조반니’만을 위한 공간이 국립 마리오네트 극장이다.
물론 일부 클래식 애호가, 특히 오페라 마니아들은 인형극 ‘돈 조반니’를 맹비난한다. 모차르트의 가장 위대한 오페라 중 하나를 싸구려 볼거리로 전락시켰다며. 그것도 국가가 관리하는 극장을 만들어 1년 365일 공연하면서 모차르트를 웃음거리로 만든다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와 달리 프라하를 찾는 여행자는 카를교, 프라하성과 함께 인형극 ‘돈 조반니’를 필수 관광코스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정통 오페라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오페라 ‘돈 조반니’는 본 적 없어도 마리오네트 인형극 ‘돈 조반니’는 봤다고 할 정도.
프라하는 환상적인 중세 건축물의 거대한 박물관이면서, 유럽 음악의 위대한 고향으로 유럽 그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운 문화의 도시다. 닿는 발길이 모두 문화재고, 눈길이 머무는 곳 모두가 예술이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1989년 프라하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처럼 거창하고 휘황찬란한 문화말고도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빛나는 거리의 문화도 있는 도시가 프라하다.
기념품은 물론, 싱싱한 과일과 채소, 예술성 높은 그림과 LP판을 비롯해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재래시장 하벨 시장은 프라하의 또 다른 자랑거리다. 성하벨 교회 인근에 있는 이 시장은 평일에는 주로 과일과 채소를 팔아서 체코어로는 ‘오보츠니 트르흐(과일시장)’라고도 불리는데, 주말엔 프라하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을 위해 마리오네트 인형과 수제 공예품들, 심지어는 잘츠부르크가 원조인 모차르트 초콜렛 ‘짝퉁’도 판매를 한다.
프라하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프라하에 대한 짝사랑을 품는다. 프라하를 한 번 다녀간 사람은 오랜 시간 동안 연인과의 아픈 이별을 실감한다. 그리고 프라하를 두 번 이상 다녀온 사람은 비로소 성장의 통증을 이겨내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온몸에 담을 수 있는 성인이 된다. 그렇게 프라하는 삶과 아름다움의 고혹한 가치를 여행자에게 안겨주는 멋진 도시다.
글·사진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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