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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거장들의 초대를 받다


입력 2014.05.17 08:27 수정 2014.06.07 11:32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유럽에 미치다⑨-오스트리아 빈2>음악의 도시에서 환희를 노래한다

성 슈테판 성당에서 바라본 빈 시내. ⓒ이석원

오스트리아는 서기 6세기 초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의 역사는 오스트리아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 빈(Wien)이라는 지명은 2000여 년 전 로마인들이 북쪽 국경지대인 도나우강 주위에 세운 방어도시 빈도비나(Vindobina)에서 비롯된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1500여 년의 오스트리아 역사보다 빈의 역사는 500여 년이 앞서는 셈이다.

빈이 음악의 도시가 된데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할이 가장 컸다. 빈 출신이거나 빈에서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비롯해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요한 스트라우스 2세, 브람스, 말러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원이 있어왔다.

빈을 상징하는 최고의 음악가는 단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다.

빈 시내 호프부르크 왕궁 부근에 있는 모차르트의 동상. 빈 시민들 뿐 아니라 빈을 찾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인증샷을 찍는 명소다. ⓒ이석원

1756년 오스트리아의 서쪽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대성당 부악장이자 궁정 전속 작곡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서 5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후 6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천재였다. 모차르트가 빈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25세 때인 1781년이지만 훨씬 이전인 1762년 빈에서의 첫 흔적이 나타난다.

모차르트는 6살이던 1762년 누나 마리아 안나와 함께 빈의 쇤부른 궁전에 초대받는다. 모차르트가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차르트 남매를 불러 피아노 연주를 들은 곳은 쇤부른 궁전에서도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이 ‘거울의 방(Spiegelsaal)’이었다.

쇤부룬 궁전은 프랑스 부르봉 왕가보다 검소한 성격을 지닌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서가 그대로 담겨있다. 방의 갯수만도 1441개 이르는 엄청난 규모지만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면 그 규모는 훨씬 작다. ⓒ이석원

쇤부른 궁전은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난 후인 1695년 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레오폴드 1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달래고, 오스트리아의 번영을 다짐하는 뜻에서 여름 별궁을 짓기로 했다. 황제는 오스트리아 최고의 건축가인 피셔 폰 에를라흐에게 아름답지만 화려하지 않고, 멋지지만 크지 않은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1695년부터 짓기 시작한 쇤부른 궁전은 레오폴드 1세와 에를라흐가 모두 숨진 이후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서 완성된 것이다.

쇤부른 궁전에서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인 거울의 방. 이 방도 처음 건축 당시 크고 화려하게 설계 됐지만 레오폴드 1세는 설계 도면을 대폭 축소해 방을 만들게 했다. ⓒ이석원

현명하고 강인하면서도 따듯한 계몽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에 이르는 자녀들을 이용해 유럽 각국과 결혼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늘렸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래서 쇤부른 궁전 ‘거울의 방’에서 자녀들과 함께 놀거나 연주회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날도 잘츠부르크에서 온 6살 꼬마 모차르트의 신기에 가까운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면서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그 때 모차르트의 눈에는 한 떨기 에델바이스처럼 작고 예쁜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는 여제에게 그 소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여제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왕자 공주들과 오스트리아의 대신들은 포복절도를 했다. 모차르트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소녀는 여제의 15번째 자녀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였다.

모차르트와 그 공주의 인연이 그 이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차르트가 프랑스 파리에 잠시 머물던 1777년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도 파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더 이상 마리아 안토니아가 아닌 마리 앙투아네트였고,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왕비였다. 그리고 12년이 더 지난 후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다시 4년 후인 1793년 10월 16일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일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던 모차르트는 2년 앞서 세상을 떠나 첫사랑의 비참한 죽음을 알지는 못했다.

빈에서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서울에서 휴대전화 매장을 찾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지만 25살이 되던 1781년 빈으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빈 중심가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대형 건물인 국립 오페라극장. 1642개의 좌석과 567개의 입석은 1년 내내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2차 대전으로 빈이 폐허가 됐을 때 시민들을 대상으로 국회의사당, 시청, 오페라극장 중 어느 것을 제일 먼저 재건할 것인가 하는 투표를 했을 때 빈 시민들은 오페라극장을 택했다. ⓒ이석원

개관 공연으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올린 이후 오페라극장에서는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지만 그래도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코지 판 투테' 등 모차르트의 작품이 가장 많이 공연된다. ⓒ이석원

빈의 가장 중심지인 케른트너 거리가 시작하는 곳에 있는 국립 오페라극장도 모차르트와 인연이 깊다. 모차르트가 사후 78년이 되는 1869년에 개관한 국립 오페라극장은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함께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으로 불린다. 이 극장이 처음 문을 열면서 올린 공연이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다.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빈 시민들은 혹평 했다. 크기만 했지 예술적 아름다움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이 건물의 설계자가 자살을 했다. 나중에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면 자살한 설계자도 그나마 위안이 됐을 것이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 이곳에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고 해서 지금은 이 집을 '피가로 하우스'라고 부른다. ⓒ이석원

다시 모차르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빈에 정착한 다음 해에 콘스탄체를 만나 결혼한 모차르트는 10여 년 동안 무려 13번의 이사를 하면서 살았지만 그중 가장 오래 살았던 곳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 지금은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꾸며져 ‘피가로 하우스’라고 불린다. 그 무렵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면서 적잖은 돈도 벌었다. 그러나 부부의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 돈이 떨어져도 천재에게 곡을 부탁하는 사람도 많았고, 사가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돈이 아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흥청망청 돈을 쓰던 모차르트 부부는 1790년이 지나면서 극도로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1791년 모차르트는 프란츠 폰 발젝 백작으로부터 장례미사에 쓸 미사곡을 의뢰받았다. 그 해 2월에 죽은 부인을 기리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파격적인 돈을 제안했다. 모차르트는 그 곡을 쓰는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고, 급기야 그해 12월 5일 모차르트는 그 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갑자기 숨을 거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가 죽은 것이다. 그때까지 모차르트가 쓰고 있던 그 장례미사곡은 ‘레퀴엠’, 백작 부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만들던 곡이 결국 자신의 장송곡이 된 셈이다.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열렸던 성 슈테판 성당. 하지만 이 성당 밖 한쪽 벽에서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이석원

빈은 천재의 죽음에 냉랭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 슈테판 성당 한 켠에서 초라하게 치러졌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결혼식이 열렸던 곳에서의 장례식, 차라리 천재의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장례식이었다면 의미가 남달랐겠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부인 콘스탄체와 두 아들, 그리고 몇몇 친구만이 참석했다. 그에게 열광했던 합스부르크의 왕족도, 빈의 귀족들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마르크스 묘지. 하지만 이곳이 실제 모차르트의 묘지라고 생각하는 빈 시민들은 거의 없어서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이석원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성 슈테판 성당에서 초라한 장례식을 마친 모차르트의 관은 마차에 실려 약 5km 떨어진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로 향했다. 콘스탄체 등 유족들은 묘지의 정문에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시신은 다른 이름 모를 시신들과 함께 한 구덩이에 묻혔다. 콘스탄체와 가족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모차르트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모차르트가 죽고 103년이 지난 1894년 빈 시당국은 시내에서 동남쪽 한적한 곳에 대규모 묘지인 시립 중앙묘지를 형성한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명인들의 묘지를 한 곳에 모은 것인데,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 브람스 등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들의 묘지를 따로 모아놓았다. 그리고 비록 시신도 없는 기념비지만 모차르트도 이곳에 함께 했다. 그의 죽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빈 시민들은 그가 죽고 100년이 넘어서야 그를 그리워했고, 또 그를 열심히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빈 시립 중앙묘지의 정문. ⓒ이석원

시립 중앙묘지의 가로수 길은 빈 시민들의 산책로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길에서는 캐럴 리드 감독의 1949년 영화 '제3의 사나이'의 촬영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석원

빈 시립 중앙묘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이라는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짙은 나무들이 그늘을 내어주고, 늘 차고 깨끗한 물이 펑펑 쏟아져 나오는 우물에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도심의 번잡함도 전혀 없는 평화로운 이 공간은 죽은 이들만의 휴식처가 아니라 산 빈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편안함의 공간이다.

가운데 여인의 동상이 모차르트의 기념비다. 중앙묘지서 모차르트의 기념비를 찾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꽃이 가장 많은 묘지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모차르트 기념비 뒤 왼쪽이 베토벤의 묘지고, 오른쪽이 슈베르트의 묘지다. ⓒ이석원

빈 무도회의 꽃이라고 불리는 왈츠를 세계적인 춤곡으로 만든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 수많은 왈츠곡으로 유명한 그의 장례식에는 빈 시민 10만명이 참석했다. ⓒ이석원

낭만주의 시대 음악가이면서도 베토벤의 음악을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을 듣는 요하네스 브람스의 묘지. 독일 함부르크 출신인 브람스는 자신의 스승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산 것으로 유명하다. 29살부터 빈에서 살다가 평생의 외사랑 클라라가 사망한 다음 해인 1897년 빈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석원

정문에서 100여m 들어가면 왼쪽에 32-A 구역이 나오는데 ‘MUSIKER’라는 팻말과 함께 음악가들의 묘역이 나온다. 푸른색 여인의 동상이 모차르트의 기념비. 그 뒤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지가 좌청룡 우백호처럼 서 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왈츠의 황제’ 요한 스트라우스와 평생 스승의 아내를 사랑했던 브람스의 묘지가 아름다운 조각과 함께 놓여있다.

이 묘역에서 빈 시민들의 꽃 선물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물론 모차르트의 기념비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의 발길을 가장 많이 붙잡는 것은 ‘악성’ 베토벤의 묘지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빈 출신도, 오스트리아 사람도 아니다. 1770년 독일 라인강변의 작은 도시, 그러나 서독 시절 수도이기도 했던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22살이 되던 1792년에 빈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35년간 빈에서 살았다.

괴팍한 성격의 베토벤도 이사가 잦은 편이었는데 그런 중에서도 빈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 파스콸라티하우스다. 베토벤의 괴팍한 성격을 잘 받아줬던 집주인 파스콸라티 남작의 이름을 딴 집인데, 지금은 베토벤 기념관으로 쓰인다. 이곳에는 베토벤의 라이프 마스크와 그가 사용하던 그랜드 피아노 등이 전시돼 있다. ⓒ이석원

1800년 무렵 베토벤은 브룬스빅이라는 귀족 집안의 피아노 교사가 됐다. 그리고 그 집에서 베토벤은 운명적인 여인을 만난다. 17세의 줄리에타였다. 브룬스빅 집안의 조카였던 그녀는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못생기고 성질도 괴팍한데다가 나이도 많지만 어딘지 모를 묘한 매력을 지닌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베토벤 또한 백합같이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줄리에타에게 빠져들어 그녀와의 결혼을 꿈꿨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차마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신분의 차이다. 귀족가문인 줄리에타는 평범한 신분의 베토벤과는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줄리에타는 베토벤을 아쉬워하면서도 20세의 미남 귀족 갈렌베르크와 결혼했다.

줄리에타에게서 실연당한 베토벤은 극심한 좌절감을 안고 1802년 빈 근교에 있는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 무렵 베토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들었던 귓병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줄리에타와의 이별, 성당 종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귀, 걷잡을 수 없이 불행해지고 있는 베토벤은 두 동생 앞으로 유서를 쓴다. 자신의 괴팍한 성격과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후회하는 내용이었다.

베토벤이 점점 더 심해지는 귓병과 간경화, 우울증 등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시절 지냈던 휴양지인 하일리겐슈타트의 베토벤 기념관. ⓒ이석원

그러나 베토벤이 죽기로 결심했던 하일리겐슈타트는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열정을 심어주었다. 1892년 빈에 편입된 후 지금은 빈 시내 중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20분 정도 가면 나오는 하일리겐슈타트는 1780년대 광천수가 개발되면서 유명한 휴양지가 됐다. 베토벤이 머물던 때 하일리겐슈타트는 넓은 포도밭을 중심으로 목가적 분위기가 펼쳐진 전원이었다. 유서를 쓴 직후 그는 4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22, 26, 27(no1과 no2), 28번이다. 그 중 27 no2는 헤어진 연인 줄리에타에게 헌정된 곡이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월광 소나타’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머문 지 4년에서 6년이 되던 1806년부터 1808년,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 벌어진다.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생애 최악의 순간, 최고의 작품이 탄생한 아이러니. 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인 베토벤 최고의 걸작은 그렇게 빈 외곽의 한적한 곳에서 거짓말처럼 만들어졌다. 베토벤이 머물렀던 하일리겐슈타트 프로부스가세 6번지의 건물은 지금도 베토벤 기념관으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부른다. 이곳엔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와 유서, 그리고 유산 목록 등이 남아 전시되고 있다.

시립 중앙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묘지. 1826년 도나우강변 그나이크센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집에 갔다가 제수씨와 심하게 다툰 후 큰 상심을 얻어 추운 겨울 무리하게 빈으로 돌아오다가 병을 얻은 베토벤은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 3월 26일 외롭게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빈 시민들에게 큰 슬픔이었고, 그래서 그의 죽음을 배웅하기 위해 장례식에 나선 사람이 무려 2먄명에 달했다. ⓒ이석원

1827년 베토벤이 숨졌을 때 빈 시민들은 모차르트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베토벤의 장례식은 2만 명이 넘는 빈 시민들로 가득했고, 운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음악의 성인’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장례식에서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며 “죽어서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30살의 무명 음악가가 있었다. 훗날 ’가곡의 황제‘로 불리게 된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였다.

빈에 인접한 리히텐탈이라는 곳에서 1797년에 태어난 슈베르트는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의 고전주의 음악가들과는 달리 어렸을 때 악기보다 노래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8살 때부터 교회 성가대 활동을 했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등의 악기를 배우기도 했다. 슈베르트가 기악곡보다 예술 가곡에 집중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빈 시내 중심에 있는 시립공원 슈타트파크는 1862년 문을 열었다. 거기서 마치 황제처럼 근엄하고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슈베르트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무릎 위에는 악보를,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마치 명상하듯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슈베르트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동상과 함께 빈 슈타트파크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석원

아무튼 빈에서 태어나 일생의 대부분을 빈에서 살았던 슈베르트는, 그러나 그가 존경하던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는 달리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은 바도, 그의 곡이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린 적도 없다. 그래서 생활은 늘 궁핍했고, 밥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평생 소원이 베토벤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고, 끝내는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면서 “죽어서 그의 곁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던 것이다.

빈에서 슈베르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여러 곳이지만 특히 중심가인 케른트너 거리 동쪽 인근에 있는 시립공원에는 마치 황제의 모습을 닮은 슈베르트의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슈베르트가 행복해하는 곳은 시립 중앙묘지일 것이다. 그의 소원대로 우상인 베토벤의 곁에 묻혀 있으니 말이다. 베토벤의 운구에 참여했던 그는 그 다음 해인 1828년 11월 9일 장티푸스를 앓다가 사망했다. 하지만 혹자들은 그가 굶어죽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사망 당시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지는 원래 벨링크 묘지에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의 묘지는 시립 중앙묘지로 옮겨진 것이다.

중앙묘지에 있는 슈베르트의 묘지. 그는 빈에서 워낙 유명하고 존경받는 베토벤에 가려서 죽는 날까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 가곡은 이후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석원

오스트리아 빈이 사랑했고, 또 빈을 사랑했던 음악가들은 이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외에도 하이든, 브루크너, 브람스,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 말러, 그리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통하는 카라얀까지 무척 많다.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고전주의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시기 음악사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위대한 음악가들이 사랑했고, 또 그 위대한 음악가들을 사랑한 도시 빈.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도나우강을 보면서 빈의 오래된 구시가를 거닐고 있으면 늘 환청처럼 귀에서 떨어지지 않는 음악소리가 흐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글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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