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 이창동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것에 도전해야죠"
영화 '버닝'으로 8년 만에 스크린 복귀
세상의 미스터리 알리고 싶었죠
영화 '버닝'으로 8년 만에 스크린 복귀
세상의 미스터리 알리고 싶었죠
이창동 감독(64)은 언론 매체와 인터뷰를 좀처럼 하지 않는 감독이다. 작품 자체로만 얘기하고 싶다는 곧은 심지 때문이다.
'버닝'으로 8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이 감독을 25일 서울 팔판동에서 만났다.
'버닝'은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 등을 만든 이 감독의 6번째 장편영화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유통회사 아르바이트생 종수(유아인)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 혜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내용을 담는다. 영화는 희망 없는 내일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분노, 무력감, 그리고 우울함을 짚는다.
칸 영화제에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 영화는 극찬을 받으며 황금종려상 유력 후보로 점쳐졌지만 수상에 실패했다. 대신 세계 영화평론가·영화기자들이 가장 예술성 높은 작품에 주는 상이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
이틀 전 칸에서 돌아온 이 감독은 "'버닝'은 관객들이 자유롭게 느끼길 바라는 영화인데 이런 자리가 마련돼서 설명하게 됐다"고 웃었다.
이 감독은 2007년 '밀양'(전도연 여우주연상 수상), 2010년 '시'(각본상 수상)에 이어 세 차례 연속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칸이 체질에 맞지 않다"며 "최상급의 레드카펫에서 손 흔드는 게 불편하다"고 털어놨다.
이 감독은 '버닝'을 미스터티 투성이 같은 영화라고 소개한 바 있다. 영화는 꽤 불친절하다. 종수, 벤, 해미 모두 어떤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인물로, 영화는 이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모든 게 명쾌하지 않아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 호불호도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칸에서는 극찬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난해하다"는 평이 많다.
이 감독은 '버닝'을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영화'라고 인정했다. 낯설고 영화적 관습에서 벗어난 영화란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영화는 무난한 영화이지만, '버닝'은 그렇지 않아요. 근데 이상하게도 칸에서는 다들 좋다고 하니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했어요. 황금종려상 수상 가능성을 대놓고 예상하는 경우도 드물고요. 국내 반응은 칸과는 너무 다르더군요. '이건 또 뭐지?' 싶더라고요. 이 부분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벤은 누구일까', '해미의 우물 이야기는 진짜일까?', '고양이는 실제로 있었을까?', '해미는 어디 있을까?' 등 여러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결말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
이 감독은 종수, 벤, 해미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관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대상을 바라보는데 이야기 연결이 잘 안 되죠.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상상하면 봤으니깐요. 사실 벤이 해미를 죽였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영화를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부족하다며 비판을 합니다. 모호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어느 하나가 반드시 옳은 경우는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이런 눈으로 바라보는 영화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극 중 해미는 종수에게 "귤이 있다고 믿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는 거야"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 감독은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 있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인식과 믿음의 차이를 건드리고 싶었다"며 "우리가 믿고 원하는 이야기는 어떤 건가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어 "하나하나 분명하게 생각하고 따지고 들어가면 안 맞는 부분이 새긴다"며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고 했다.
그는 '버닝'을 통해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을 들여다봤다. 앞서 그는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요즘 세상을 생각해봤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보다 못 살고, 힘들어지는 최초의 세대라고 생각한다. 계속 발전했지만,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젊은이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분노도 생각했고, 무엇 때문에 미래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종수가 사는 파주는 벗어나고 싶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대부분 청년은 깔끔한 도시에 살지만 어떤 청년들은 종수가 마주한 공간에 산다. 이 세상이 품은 문제이자 미스터리다. "제가 젊었을 때는 세상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모순이 있지만 그 모순을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죠. 근데 지금은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답이 없어요. 세상은 편리해지는데 사람들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고요. 분노를 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죠. 이런 현실에선 일상의 아주 사소한 부분들이 끔찍한 무언가가 될 수 있어요. 종수가 벤에게 분노하는 것처럼요."
영화는 해질녘 노을을 아름답게 담았다. 이 감독은 "아름답게 찍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밤과 낮의 경계에 있는 저녁이라는 시간, 종수가 사는 지저분한 공간, 그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외제차 등 총체적인 부분을 담으려 한 것이다.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설정에 대해선 "종수는 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자기 동네를 뛰어다니며 벗어나고 싶은 현실과 원초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해미가 종수보다 더 한국 청년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했다. 해미는 카드빚을 지고 있지만 해외여행도 가고, 힘들어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또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고민도 한다. 해답 없는 답을 찾는 과정의 연속이다.
일각에서는 해미가 소비된 여성 캐릭터라는 지적도 있다. 이 감독은 "앞서 여성이 소비된 영화가 정말 많았는데 왜 내 영화에 이런 질문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라며 "여성이 꼭 주인공이어야 여성 중심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말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이 감독은 "나름대로 생각의 여지를 연 결말"이라며 "일을 저지른 종수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 듯한, 무언가 두려워하는 복잡한 감정을 담았다. 해석은 관객에게 던져 놓고 싶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상의 미스터리를 향한 무력감을 어떻게 해소하고 표출하는지도 짚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들에 대해선 칭찬을 이어갔다. "유아인 씨는 원하는 걸 잘 받아줬어요. 힘들 수도 있는데 잘 해줬죠. 벤은 모호한 캐릭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잘 연기해줬죠. 미묘한 연기는 스티브 연 씨가 아니면 못했을 겁니다."
'버닝'의 흥행 성적은 좋지 않다. 상영관도 별로 없고, 마블 히어로물에 밀려 고전 중이다. 이 감독은 "관객이 슈퍼 히어로가 세상을 구원해줄 거라는 희망이 가득한 상황에서 '버닝 같은 영화는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볼 만하다"고 했다.
이 감독은 자신이 항상 상업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만들었는데, '버닝'은 마케팅 자체가 '칸 수상'에 쏠렸던 터라 수상이 불발된 탓에 안 좋은 분위기를 탔다. 그래도 이 감독은 "누군가는 새롭고 낯선 걸 해야 한다"며 "영화 산업 전체를 위해 항상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작을 물어봤더니 이 감독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잘 모르겠어요. 8년 동안 많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고민도 많이 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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