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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영원한 野人' 손학규의 지난 10년, 새로운 10년


입력 2018.09.02 16:37 수정 2018.09.02 17:12        정도원 이동우 기자

정치역정 사반세기, 야당생활만 20년

한나라당 탈당이 '잃어버린 10년' 초래

돌고돌아 3당 대표로…野性 보여줄까

'사반세기 정치역정'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선출
25년 정치인생 중 20년 야당생활 '풍운아'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 대표가 2일 의원회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된 직후 두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9·2 전당대회에서 바른미래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손학규 대표는 사반세기 정치역정에서 야당 생활이 더 익숙한 풍운아이자 '정계의 야인(野人)'이다.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손 대표는 부친의 이른 타계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뛰어난 학업 성적을 보이며 당대의 명문 경기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경기고 재학 중에는 박정희정부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러한 손 대표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한 뒤 학생운동·사회운동에 뛰어든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유신 치하였던 1978년 모친마저 타계하자 지명수배 중에 장례식 참석을 기도하다 체포·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정부가 10·26 사태로 붕괴하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따고 1990년 귀국,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1993년 YS 발탁으로 정계 입문
2002년 경기도지사 당선되며 대권주자 반열


'한나라당 트로이카' 시절의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과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 대표(자료사진). ⓒ데일리안

손 대표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은 인재 욕심이 많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1993년 정권을 잡은 김 전 대통령은 손 대표에게 민자당 입당을 제의했다. 이해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에 출마한 손 대표는 '대통령이 불렀다, 개혁 위해 나섰다' 슬로건으로 당선돼 본격 제도정치권에 입문했다. 사반세기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의 시작이었다.

자민련 분당(分黨)으로 집권여당 신한국당이 참패한 1996년 총선에서도 무난히 재선 고지에 오른 뒤, 보건복지부장관으로 의원입각했다. 하지만 1997년 정권이 교체되며 25년 정치역정 동안 짧은 여당 생활을 마무리하고 야인의 길로 들어섰다.

2000년 총선에서 야당 의원으로 3선 고지에 오른 손 대표는 2002년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58.4%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집권여당 새천년민주당 진념 후보를 꺾고 도백(道伯)이 된 손 대표는 단숨에 잠재적 대권주자 반열에 우뚝 섰다.

지방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패배했다. 정권교체의 꿈이 산산히 무너지면서 손 대표의 야당 생활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정부 동안 손 대표는 경기도지사로 활약하며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야권 트로이카'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경기도지사 재선 도전을 포기한 것은 대선후보 경선에 본격 뛰어들겠다는 뜻이었다.

'잃어버린 10년' 한나라당 탈당이 최대 변곡점
대통합민주신당 가담했으나 정동영에 경선 석패


민주당 대표 시절의 손학규 대표가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데일리안

그의 정치역정에서 최대 변곡점으로 간주되는 게 10년 전 한나라당 탈당이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친이·친박계 항쟁 속에 설 자리가 없자, 손 대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여권의 '헤쳐모여'식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가담했다.

이 정도 승부수를 던졌다면 반드시 대선후보가 됐어야 맞는 것이었지만, 손 대표는 정동영 현 민주평화당 대표와의 각축전 끝에 대선후보 경선에서 석패했다. 무엇을 위한 탈당이었는지 모르게 된 것으로, 그의 정치역정이 꼬이게 된 출발점이기도 했다.

2008년 정권교체가 됐으나, 직전에 당적을 옮긴 그는 계속해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통합민주당 당대표로 선출된 손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에 맞서 특유의 촌철살인으로 맞공세를 펼쳤다. 정권교체 직후 치러진 불리한 여건 속의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서울 종로 출마라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박진 전 의원에게 패배하며 그의 '첫 번째 칩거'가 시작됐다.

강원도에서 칩거하던 손 대표는 2010년 정계에 복귀했다. 민주당 대표가 된 그는 이듬해 보수정당의 아성으로 여겨지던 경기도 분당을 보궐선거 출마를 결행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서로의 정치운명을 건 벼랑끝 승부에서 승리한 손 대표는 기사회생했다.

'저녁이 있는 삶' 들고나온 2012년 대선
친노 조직력에 밀리며 대선후보 경선서 또 패배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손학규 대표와 문재인 대통령(자료사진). ⓒ데일리안

손 대표는 그 유명한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을 내걸고 2012년 대선후보 경선에 재도전했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名)슬로건이지만, 정작 경선에서는 친노(친노무현)계의 조직력에 밀리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었다. 독일에 외유한 뒤 돌아와 2014년 수원 팔달 보궐선거에 출마했다가 패배하며 전남 강진 만덕산에서 2차 칩거에 들어갔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 민심이 요동치며 국민의당이 창당되자 정계 복귀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타이밍을 놓쳤다. 손 대표는 지난해 10월에야 비로소 하산(下山), 국민의당에 합류했으나 직후 탄핵 사태로 조기 대선 정국이 펼쳐졌다.

입당한지 얼마되지 않은 손 대표에게는 너무나 준비할 기간이 부족했다. 지난해 펼쳐진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안철수 전 대표·박주선 의원과 경쟁했으나, 창당 주역이었던 안 전 대표에 비해 당내 입지, 활동 기간 모두에서 현격한 열세를 드러내며 세 번째 대선후보 도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국민의당 합류, 안철수와 '정치적 동맹'
야당생활만 20년, 바른미래당에 野性 입힐까


지난해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안철수 전 대표,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과 손을 맞잡고 있는 손학규 대표(자료사진). ⓒ데일리안

지난해 치러진 조기 대선에서 다시 한 번 정권교체가 됐지만 직전해에 제3당에 합류한 손 대표의 야당 생활은 계속됐다.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손 대표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안철수 전 대표와 정치적 연대 관계를 형성했다. 안 전 대표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라는 승부수에도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결국 안 전 대표의 잇따른 정치적 승부수가 실패로 돌아가며 외유가 불가피하게 되자, 손 대표와의 바톤 터치는 필연적인 수순이 됐다. 9·2 전당대회에 출마를 선언한 직후부터 대세론을 형성하며 무난히 당대표에 선출됐다. 2011년 민주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7년 만의 야당 대표 복귀다.

정치인생의 큰 변곡점이었던 한나라당 탈당 이후 10년, 손 대표에게 아픔만을 남겼던 민주당계 야당 생활 10년과 다른 제3당 대표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그에게 맡겨졌다. 올해 71세 나이인 손 대표가 앞으로 '새로운 10년' 정치를 펼쳐가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난 10년과는 다른 어떠한 면모를 보여줄지 주목된다는 지적이다.

정도원 기자 (united97@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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