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오거돈 충격, 국민 뇌리에 또렷한데
스스로 만들었던 당헌까지 뒤집으며 공천
국민과 약속 소중히 생각했다면 무공천했어야
자충수 돼 돌아올 수도…두고두고 후회할 것
4·15 총선 승리를 발판 삼아 지난 8월 당대표에 오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60.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이 말해주듯 당선 일성에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원칙'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대표가 강조한 민주당의 '원칙'은 3개월도 되지 않아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정당이 되겠다"며 제 손으로 만들었던 당헌도 내팽개쳤다. 지지층의 의사를 따랐다는 변명은 비겁하고 한심하다.
이낙연 대표는 결국 '보궐선거의 귀책사유가 민주당에 있을 경우 후보를 내지 않는다'고 명시된 당헌을 뜯어고쳐 내년 4월 열리는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민주당 소속이던 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여비서 성추행 혐의와 극단적 선택,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부하직원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퇴한 기억은 전 국민의 뇌리에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런데도 이를 완전히 무시한 결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치인생 내내 '정치개혁'을 주창했던 이낙연 대표를 바라보며 "그래도 좀 다르지 않을까"했던 국민들의 기대감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철저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사실 민주당 전체의 의견이 오롯이 반영된 결과도 아니다. 이낙연 대표가 당헌 개정의 명분을 쌓기 위해 택한 '전당원투표'의 투표율은 고작 26.4%였다. 표결 성립 자체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까지 제기될 수 있는 수치다.
민주당 당원 중에서도 불과 4분의 1 수준의 극성당원, 일명 '대깨문'이라 칭해지는 세력만이 표결에 참여해 전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정상적인 정당의 모습도, 바람직한 리더십도 사라진 한심한 작태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보궐선거 승리를 발판 삼아 확고한 대권주자로 발돋움해야 할 이낙연 대표의 입장에서 친문 세력의 따가운 눈총과 대깨문들의 성화를 도저히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슨 짓을 해도 국민들 다수가 지지를 보내준다는 굳건한 믿음이 바탕이 된 확고한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다만 진정한 리더로서 국민과의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불과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당대표로 활동하던 시절 '정치개혁 작업의 일환'이라며 만들었던 당헌을 스스로 뒤집으며 공천을 강행하기보다는, 무공천을 통해 약속을 지키는 편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보다 더 '바람직한 리더의 상'으로 국민들 마음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이낙연 대표 스스로 발로 차버린 이 기회가 자충수가 돼 돌아오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보궐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이 대표는 명분과 실리,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놓친 이번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