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 '동주' 이어 '자산어보' 흑백 영화 개봉
독특한 질감, 배우의 표정, 인물의 심리 극대화 장점
현재 극장에 걸리는 많은 영화들은 컬러 필름으로 만들어진다. 195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 상업영화는 흑백으로 제작됐지만 이후 코닥의 컬러 필름이 등장해 빠르게 대체됐다. 화려한 볼거리와 색감으로 표현한 미쟝센 등에 익숙해 컬러 영화가 당연해진 지금, 가끔 접하는 흑백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긴다.
흑과 백으로 이뤄진 필름 속 인물과 풍경은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과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컬러 영화에 비해 주제와 정서를 조금 더 확고하게 전달하는데 유용하게 쓰이기도 한다. 흑백 촬영의 경우 밝기와 색상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빛과 그림자까지 설계해야 하지만 강도에 따라 깊이 있는 정서를 전달하는데 탁월하다. 이에 특정한 의도를 연출하기 위한 흑백 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이준익 감독은 '동주'에 이어 5년 만에 '자산어보'를 흑백 필름으로 촬영했다. '자산어보'는 흑산으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컬러는 세 장면에서 등장한다.
창대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과 육지에서 다시 흑산으로 돌아가는 배 위의 장면이다. 대부분 장면들은 흑백이 조선시대란 배경과 어우러져 한 편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감독은 '자선어보'를 흑백으로 만든 이유를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 거 같아서 고집해서 만들었다"고 설명하며 "보고싶은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 보자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라고 전했다.
'동주'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의 혼란스러운 사회와 청년 윤동주, 그의 벗이자 사촌이었던 송몽규를 흑백 영화에 담아냈다. 영화는 윤동주의 고뇌와 갈등, 우울한 심상이 차분한 흑백 영화와 절제된 대사로 시대의 아픔을 보여줬다. 이준익 감독은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의 모습을 최대한 담백하고 정중하게 표현하기 위해 흑백 영화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홍상수 감독의 '오!수정'과 '북촌방향', '그 후', '풀잎들',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인트로덕션'도 흑백 영화로 감상할 수 있다. '오!'수정'은 같은 상황을 수정(이은주 분), 재훈(정보석 분) 두 사람의 기억으로 다르게 두 번 보여주는데, 홍상수 감독은 인물들의 감정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 이 상황을, 컬러가 주는 다양한 색감이 방해하지 않길 바랐다는 의도를 전했다.
'오!수정', '그 후', '풀잎들', '인트로덕션'이 흑백 영화를 목표로 제작한 반면, '북촌방향'은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홍상수 감독은 눈 내리는 서울의 느낌과 영화의 분위기가 흑백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판단해 편집 후반부 색을 배제하기로 결심했다.
'춘몽'의 장률 감독이 흑백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꿈 속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다. '춘몽'은 제목 그대로 '봄날의 꿈'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영화로, 흑백과 컬러를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로 사용했다.
'프란시스 하'는 엉뚱하지만 어디엔가 있을 법한 뉴요커 프란시스의 홀로서기를 그린 영화다. 세계에서 제일 화려한 도시인 뉴욕과 싱그러운 청춘이 등장하는 영화지만, 색감을 빼자 대도시와 장밋빛 청춘이 잿빛으로 보인다. 컬러가 낭만과 꿈을 상징한다면 흑백은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과 인물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정확하게 보여준다. 좌절하는 청춘의 꿈은 흑백의 여운이 더해져 관객들의 공감을 얻기 충분했다.
독립영화 '다영씨'는 흑백에 무성 영화로 만들어졌다. 배우들은 표정과 제스처만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 내용을 이해하기 불편할 것 같지만, 이 요소는 관객들이 영화를 궁금하게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했다. 흑백이 가지고 있는 선명성이란 장점에 의지한 영화다. 현란한 색채를 배제해 인물이 가진 본질적인 것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제31회 도쿄국제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차지한 타케 마사하루 감독의 '더 건'은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면 모두가 흑백으로 이뤄졌다. 우연히 총 한 자루를 손에 넣은 대학생 도루(무라카미 니지로 분)가 총에 집착하게 되는 이야기로, 흑백을 활용해 권총에 지배당해 광기로 번져가는 도루의 심리를 쫓는다. 도루가 공허한 눈빛으로 방아쇠를 당기면 붉은 핏자국을 보여주며 끝이난다. 마지막 엔딩은 도루 내면의 변화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애초에 흑백으로 기획된 영화들과 달리 '기생충'은 컬러 영화를 흑백판으로 리메이크해 개봉한 바 있다. 봉준호 감독은 2009년작인 '마더' 역시 2013년에 흑백판으로 내놨다. 봉준호 감독은 "내가 만약 지금 1930년대를 살고 있고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면 어떤 느낌일까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 뿐만 아니라 영화팬들도 다 그런 관심이 있을 것 같다. 컬러가 사라졌을 뿐인데 다른 느낌을 준다.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연기, 또 섬세한 연기의 디테일이나 뉘앙스를 훨씬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컬러가 사라졌을 뿐인데 다른 느낌이 있다"고 흑백판을 만든 이유를 밝혔다.
봉준호 감독의 답변에서 흑백 영화의 장점을 알 수 있듯, 흑과 백이 만드는 무채색의 단조로움, 고요한 정서가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해도 하나의 문화적 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