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한국 영화 중 최고의 흥행을 이끈 건 공유도, 설경구도, 강하늘도 아니었다. 데뷔 22년 만에 첫 단독 주연을 맡은 조우진이다. 조우진은 지난달 23일 개봉한 '발신제한'으로 6일 76만 2812명(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으로 100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조우진처럼 단역을 거쳐 조연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후 주연을 꿰찬 배우들의 반가운 활약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조연에서 주연으로 우뚝 선 배우 중 가장 대표격은 유해진이다. 유해진은 1997년 영화 '블랙잭'으로 데뷔해 2005년 '왕의 남자' 육갑이, 2006년 '타짜'에서 고광렬 역을 맡아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했다. 이후 '간첩'(2012), '소수의견'(2013), '해적:바다로 간 산적'(2014), '타짜-신의 손'(2014), '극비수사'(2015), '베테랑'(2015), '럭키'(2015), '공조'(2017), '택시운전사'(2017), '1987'(1987), '레슬러'(2018), '완벽한 타인'(2018), '말모이'(2019), '봉오동 전투'(2019) 등 많은 영화에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공고히했다. 멀티 캐스팅 작품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그는 '럭키', '공조' 등 친숙한 이미지와 코미디 연기, 그리고 따뜻함까지 겸비한 캐릭터일 때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마동석도 빼놓을 수 없다. 마동석은 2005년 영화 '천군'으로 데뷔해 단역, 조연, 특별출연 등을 통해 여러 작품에 등장했다. 강렬한 인상에 큰 덩치를 가진 마동석은 2011년 '범죄와의 전쟁'에 출연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후 '베테랑'(2015)에 특별출연으로 등장해 짧은 출연만으로 "나 아트박스 사장인데"라는 유행어를 남기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동석의 꽃길은 '부산행'(2018)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마동석의 거친 외형은 정의로운 역할을 맡았을 때 든든함을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여기에 악인에게는 악랄함이지만 선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마블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후 마동석은 '범죄도시'(2018), '성난 황소'(2018), '동네 사람들'(2018), '악인전'(2019), '시동'(2019), '백두산'(2019) 등에 출연하며 주연으로 활약했다.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로 데뷔한 라미란은 16년 만에 2021년 제41회 청룡영화상 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당시 라미란은 '윤희에게'의 김희애, '디바'의 신민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의 전도연, '82년 생 김지영'의 정유미 등을 제치고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음란서생'(2006), '괴물'(2006), '미인도'(2008), '거북이 달린다'(2009) 등에서 단역을 맡은 그는 2012년 '댄싱퀸'을 시작으로 '국제시장'(2014), '스파이'(2015), '히말라야'(2015), '덕혜옹주'(2016) 등에서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밉지 않은 역할들을 주로 해오며 대중에게 다가갔다. 여기에 힘 이어 라미란은 '걸캅스'(2018), '정직한 후보'(2019)에서 포스터에 가장 이름을 먼저 올리게 됐다.
이외에도 '신세계'(2012)에서 활약한 박성웅은 '내안의 그놈'(2018),'범죄와의 전쟁'(2011)에서 진한 인상을 남긴 곽도원은 '곡성'(2016) '조선명탐정'(2011), '베테랑'(2015) 등 다수 영화에 출연하며 상대배우와의 유쾌한 호흡으로 사랑받은 오달수는 '이웃사람'(2012)을 통해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들이 주연으로 나선 작품이 모두 성공을 거둔 건 아니다. 유해진은 2007년 '이끼'로 살인마 역을 맡았지만 대중이 보고싶어하는 모습과 괴리가 생기면서 55만명 관객에 그치고 말았다. '럭키'의 흥행 기운을 몰아 2018년 '레슬러'에 출연했지만 스포츠, 로맨스, 휴머니즘 등 장르의 혼합으로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 여기에 20살 차이 설정인 아들 친구 역을 맡은 이성경의 일방적인 로맨스는 공감을 사지 못해 손익분기점 180만명을 모으지 못하고 77만명에서 멈췄다.
마동석은 '악인전', '범죄도시'로 호평을 받았지만 2018년 연달아 내놓은 세 편의 영화 '챔피언', '원더풀 고스트', '동네사람들'은 흥행하지 못했다. 이 영화들은 마동석이 기획, 제작에 참여했다. 마동석은 자신이 출연함으로써 투자의 가능성을 높이고자하는 의도였지만 중복된 이미지 소비와 빈약한 스토리가 문제였다.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 '범죄도시'가 688만명을 동원했지만 '원더풀 고스트' 45만명, '동네 사람들' 46만명에서 멈췄다. '챔피언' 역시고군분투 했지만 175만명의 손익분기점을 도달하지 못한 112만명에서 만족해야했다.
'아수라', '곡성'에서 활약한 곽도원은 '국제수사'(2020)로 원톱 주인공에 나섰으나 작품과 연기 모두 혹평을 받으며 극장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조우진은 '발신제한' 언론시사회 기자간담회 당시 "'발신제한'을 찍었다고 내가 주연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다. 이 작품을 통해 다른 도전을 하거나 하고싶은 것만 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조연이 계속 조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아닌, 과욕을 부리지 않겠다는 의미다. 대중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대중과 자신이 원하는 것의 괴리가 클 수록 관객들은 배우들에게 낯설음을 느꼈다. 다양한 연기 도전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잘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과 판단이 동반되어야 한다. 분위기나 친분에 취하지 않고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갈 필요가 있다. 조우진의 '발신제한'은 유해진의 '럭키', 곽도원의 '곡성' 마동석의 '범죄도시'에 이어 또 하나의 성공 사례로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