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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믿었던 '명분'의 함정 [김민석의 갓심]


입력 2021.09.15 07:00 수정 2021.09.15 07:53        김민석 기자 (kms101@dailian.co.kr)

'DLF 소송' 항소, 17일 데드라인

법리적 판단·해석, 명분까지 빈약

서울 여의도 소재 금융감독원 본원 전경 ⓒ데일리안

새롭거나 주위에 미칠 영향이 큰일을 추진할 때 사람은 '명분(名分)'을 저울질한다. 명분은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 따위를 일컫는 말이다. 반대로 이 명분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히 일을 추진하면 비판을 받게 된다. 명분을 적용하려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명확한 해석과 판단이 중요하다. 합리적인 해석과 판단이 없으면 명분은 힘을 잃게 된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고민중인 항소 건이 힘을 잃은 명분의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 27일 우리금융지주 손태승 회장이 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중징계 취소 소송에서 손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금감원은 지난해 2월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태 책임을 손 회장에게 물었다. 우리금융을 이끄는 손 회장이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하는 의무에 소홀했다는 이유에서다.


법원은 금감원이 적용한 징계사유 가운데 '금융상품 선정절차 마련 위반'은 적법하다고 인정했다. 문제는 금감원이 내세운 손 회장 징계사유가 5개라는 점이다. 5개 중 4개는 잘못된 법리적 판단에 의한 명분이었다는 의미다. 즉, 금감원이 과도한 명분으로 '부당한 징계'를 내렸다는 게 법원 판단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미흡했던 내부통제 기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였다.


금감원은 최고경영자(CEO)인 손 회장과 회사 경영을 책임지는 임직원이 내부통제 기준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의무에 소홀해 DLF 손실 사태가 일어났다는 게 금감원의 해석이고 판단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금융사 지배구조법을 뜯어본 결과 손 회장은 내부통제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의무'가 있을 뿐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금감원의 판단과 해석 자체가 송두리째 뒤흔들린 셈이다.


DLF 사태에 이 같은 해석과 판단까지 적용시킨 명분은 '소비자보호'였다. CEO가 팔지 말아야 할 상품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로, 고위험 상품을 소비자에게 팔았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명분이었다.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큰 대의명분은 결국 '금융소비자보호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분쟁조정위원회가 열려 DLF는 물론 라임·옵티머스 등 최근 일련의 금융사고에 대한 손해배상금액도 책정됐다. 금감원이 세우려 노력했던 소비자보호라는 명분은 이미 금융권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법원의 판결, 소비자보호의 결과와 함께 금감원의 항소에 대한 명분은 약해졌다. 사실, 항소할 명분자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같은 논리의 명분으로 똑같은 징계를 앞두고 있는 사례가 더 있다는 점이다. 금감원은 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에서 신한금융투자, KB증권, 대신증권, NH투자증권 등 전현직 대표들에게도 중징계를 내렸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금감원이 올린 라임 관련 제재안을 9개월째 들여다 보고 있다. 박정림 KB증권 사장의 중징계안이 머물러 있는 곳은 법적인 근거를 판단하는 안건소위원회다. 금융위도 CEO 징계에 대한 명분이 약한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명분이 제대로 서지 않은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선 그 일을 그만두고, 잘못을 인정한 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금감원은 앞서 지난 2011년 파생상품 손실을 사전 차단할 내부통제 마련에 미흡했다는 이유로 황영기 전 우리은행장에게 중징계를 내린 바 있다. 당시 황영기 은행장은 제재처분취소 청구소송을 냈고, 승소했다. 금감원의 잘못된 판단과 해석 그리고 명분은 이미 일어난 적 있는 과거였던 셈이다.


하지만 세상에 늦은 것은 없다. 다행히 시간도 있다. 금감원은 항소여부를 17일까지 결정하면 된다.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을 시간은 충분하다. 오히려 금감원은 지금이라도 진정한 금융소비자 보호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해석과 판단을 시작해야 한다. 그 해석과 판단이 절실한 사람은 바로 '피해자'다. 금감원은 감독당국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대형 금융사고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판단력과 분석력을 동원해야 할 때다.

김민석 기자 (kms101@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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