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서 은밀한 사랑의 중심에 놓인 박해일. 사랑을 표현하기보다 속내를 감추고, 눈빛과 호흡의 결을 맞추는 관능적이고 위태로운 '어른들의 사랑'은 박해일의 차분함과 단단함이 만나 마침내 완성됐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 분)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 분)를 만나고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서스펜스 멜로 영화다. 박해일은 극중 최연소 경감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형사 장해준을 연기했다. 장해준은 산에서 추락사한 남성의 사건을 맡은 후 용의자인 아내 송서래에게 끌리게 된다. 자신의 일에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해준은, 서래와 사랑에 빠지며 조금씩 자신의 세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직감한다.
이 작품은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았다. 박해일은 박찬욱 감독의 이름이 호명 될 때 기분을 아직 잊지 못했다.
"전작들에서 멋진 선배들과 작업을 해오셨고 수상도 해오셨죠. 이번에도 영화에 참여한 저라는 배우를 통해 수상도 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어찌 보면 저도 일조한 것이니까요.(웃음) 그런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영화제는 처음이라 시상식 전날 참석 초대를 알려줘서 '뭐라도 받겠구나' 안도했죠. 심지어 송강호 선배님도 남우주연상 수상 하셔서 국내 영화제가 아닌가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 배우를 캐스팅 하는 방식이 아닌, 캐스팅 먼저 끝내놓은 후 시나리오를 써가는 방식을 택했다. 박해일은 거장이라 불리는 박찬욱 감독과 첫 작업으로 '헤어질 결심' 속 장해준을 잘 보여줘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촬영에 임했다.
"저는 처음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잘 읽히더라고요. 제 캐릭터에 대해 난해하고 어렵다란 느낌보다, 내가 해준이 되어보고싶단 마음이었어요. 해준의 대사들이 매혹적으로 다가왔죠. 감독님도 지지해 주셨고, 저 역시 원하신 만큼의 해준을 구현해 보고 싶었어요."
영화를 해준의 감정선에 따라 크게 두 줄기로 나뉜다. 형사로서 자부심이 높았던 해준이 서래에게 빠져들며, 자신의 신념을 반하는 과정, 그리고 두 사람의 진심 속 의중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절정에 다른다.
"해준은 형사란 자신의 직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품위도 있고요. 최연소 경감이란 타이틀이 해준을 설명해 주죠. 이런 전사는 해준이 자신에게 단단한 성격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해준의 그런 면을 보여주며 끌고 가다가 송서래란 캐릭터를 만나 감정이 흔들리잖아요. 형사라는 자신의 품격과 자부심까지 내려놓을 정도로요. 이런 감정의 변화의 흐름을 따라 초반과 후반을 보시면 더 흥미로우실 겁니다."
박찬욱 감독과 사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첫 작업인 터라 설렘과 기대도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쓰일지도 궁금했다.
"순간순간 포착해 내는 눈빛과, 찰나의 얼굴 이런 것들로 퍼즐 조각의 열쇠가 되는 것들이 작업하며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스타일도 결과를 내는데 중요한 수단이구나 싶었죠. 감독님과 오래 함께한 제작진,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배우들이 이렇게 매력적으로 표현될 수 있구나 느꼈어요. 의심과 관심으로 올려보는 순간의 해준 얼굴이라든가,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되면서 보여주는 감정들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궁금했던 점들을 해소해 주죠."
박해일은 시나리오와 콘티가 완벽하게 선행된 후 촬영이 진행되는 한국의 제작 방식을 탕웨이가 부러워했다며 귀띔하기도 했다.
"시나리오와 콘티가 최적의 경로로 막히지 않도록 잘 짜놓은 내비게이션 같았어요. 지도만큼이라도 구현해 내고 싶다는 태도로 촬영이 임했어요. 탕웨이 씨가 이런 한국 촬영 방식을 놀라워하더라고요. 할리우드에서도 작업을 해보신 분인데 시나리오 그대로 촬영할 때 이식하는 지점, 잘 짜인 콘티가 신기하다고 중국 영화계에 알려주고 싶다고 부러워했어요. 한국 제작 방식에서 쓰이는 매력적인 방식을 다른 나라에서 놀라워한다고 하더라고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도 있고, 잉크가 물에 떨어지듯 서서히 퍼지는 사람이 있다"라는 말을 후배 형사에게 해줄 만큼 장해준은 시적인 대사들과 문장을 구사한다.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문어체들의 향연이지만 박해일에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는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님이 해준 캐릭터를 만들 때 '덕혜옹주'의 김장한 캐릭터를 참고하셨다고 했어요. '덕혜옹주'의 대사도 고전적인 맛이 있죠. 품위라는 단어와 클래식한 말투를 활용했던 소스들이 있어 어렵진 않았어요. 매력 있게 잘 해보고 싶단 호기심이 강했죠. 일반적으로 형사가 시적인 대사를 하는 것들이 충돌되는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더 흥미로웠어요. 말투와 직업을 잘 섞어보려고 했어요. 또 서래가 중국인이라 우리말을 잘 못해서 내뱉게 되는 낯선 단어들, 그런 단어들이 영화의 질감을 만들기도 했고요.'
영화에서 해준과 서래는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사랑을 말하기보단, 감추고 숨긴다. 배우 입장에서는 말과 행동이 아닌 눈빛과 분위기로 캐릭터의 설득력을 부여해야 했기에 어느 때보다 고민이 깊은 현장이었다.
"영화 후반부로 갈 수록 해준에게 몰아치는 감정들, 바닷가에서 이어지는 상황들로 에둘러 감정을 차오르게 만들어야 했어요. 손에 잡히지 않고 보이는 게 아니라 괴롭기도 했어요. 주변에서 많이 도움 주셨지만 결국엔 제가 해내야 하는 숙제였으니까요. 결과적으로 만족할 만한 장면을 획득했어요. 결과는 좋았지만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탕웨이 씨 또한 잘 헤쳐나갔기 때문에 이 결과물을 즐기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해일의 강점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 40대의 나이에도 지니고 있는 말간 소년미다. 어떤 관객들은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살인의 추억'을 현규, '연애의 목적'의 유림을 찾아내기도 했다. 박해일은 자신의 강점을 계획적으로 작품에 활용할 생각은 없다. 그저 감독의 손에 맡길 뿐이다.
"제 강점을 활용하는 순간 실패한다고 생각해요. 감독님이 저라는 배우를 캐릭터에 맞게 조절해 주시면 따라가는 거죠. 그걸 활용하는 순간 조절이 안될 것 같아요.
'헤어질 결심'은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히거나 새롭게 발견되는 지점으로 인해 영화 팬들에게 N 차 관람 필수작으로 입소문을 탔다. 박해일은 다양한 관객들의 해석과 시각에 작품과 자신을 맡기려 한다.
"다른 시선으로 장해준과 송서래를 다시 보고 싶단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한 번에 다 보이는 톤의 작품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관객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해주실지 너무 궁금해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