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요 둔화·가격 하락 내년에도 '암울'
감산·투자 축소한 SK하이닉스 "전례없는 상황"
잠자고 있는 K칩스법 통과·후속 대책 마련에 여야 힘써야
국내 반도체 산업이 '혹한기'를 제대로 맞았다. 3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영업이익은 반토막이 났고 SK하이닉스는 60% 이상 쪼그라들었다. 수요 둔화에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 하락폭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4분기 실적은 이 보다 더한 '어닝쇼크'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도 팽배하다.
글로벌 조사기관들은 내년 D램과 낸드플래스 평균 판매 가격이 올해 보다 20% 이상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업황 둔화에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감산 뿐 아니라 내년 투자마저 50%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2008년 금융위기 수준에 버금가는 투자 축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SK하이닉스 경영진은 "전례없는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고통스럽다"고도 토로했다.
혹한기는 예상 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반도체를 놓고 미국과 중국간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은 자국 장비를 중국에 판매하는 것을 차단하는 강력한 수출 통제 정책을 내놨다. 중국에 생산시설을 두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년 유예를 받아 급한 불은 끈 상황이나, 이 조치가 연장될 가능성은 예단하기 힘들다. 지금 같은 분위기로는 미국이 심사나 허가 기준을 더 강화할 공산이 크다.
미국의 반도체 공세에 중국도 대대적인 투자로 맞대응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 주석은 '과학기술 자립·자강'을 강조하며 미국의 견제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실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지난 4년간 연평균 27%씩 매출 증가율을 보이며 칩4(한국, 미국, 대만, 일본)를 맹추격하고 있다.
미·중 갈등이 첨예할수록 한국 반도체는 타격을 받는다. 수출하는 반도체 중 40%는 중국향이다. 미국의 견제와 중국이 추격이 지속되는 한 대중국 수출 비중이 축소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의 타격은 우리나라 경제 성장 문제와 직결된다. 원천기술은 미국에 예속돼 있고 주요 고객사는 중국에 몰린 상황에서 적절한 '묘수' 없이는 한국의 반도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 SK하이닉스는 미국의 수출 통제에 대해 "(최악의 경우) 장비를 매각하거나 한국으로 들여오는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며 중국 사업 철수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만 발을 동동 구를 뿐 국회 차원에서 난국을 돌파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를 이끌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은 세 달 전인 8월에 발의됐지만 여전히 답보상태다. 설비 투자, 인력 양성 등 반도체 경쟁력을 키우고 미·중 패권 전쟁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야가 매일 머리를 맞대도 모자란 상황에서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반도체 혹한기는 끝을 알 수 없다는 데서 더 절망적이다. 여야는 소모적인 내부 정쟁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기업들이 전략적이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대안 마련에 골몰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살릴 법안 통과에 힘을 보태고, 후속 대책 마련에 속도감 있게 나서야 한다. 골든 타임을 놓쳐 '반도체 강국' 타이틀을 빼앗기게 한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