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업무상 스트레스로 극단선택…근로복지공단, 유족급여 지급 거부
재판부 "완벽주의적 성향과 업무상 스트레스 결합해 우울증 악화시켰다고 봐야"
법조계 "원칙적으론 산재 인정 안 돼…스트레스로 인지능력 저하됐다면 예외적 인정"
"노동자 극단선택으로 끌고 간 환경 충분히 따져야…근무시간·강도 등 판단 지표"
과장 승진 후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선택을 한 제약사 소속 수의사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법조계에선 사고가 아닌 극단선택은 원칙적으로 업무상 재해 인정이 안 되지만, 업무상 스트레스로 인지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자해를 했다면 산재로 판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근무시간과 강도, 노동자가 주변에 얼마나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는지 등 지표를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했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13부(부장 박정대)는 숨진 수의사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최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앞서 2016년 5월부터 한 대형 제약사에서 근무한 A씨의 원래 업무는 양봉·축산 관련이었지만 2020년 과장으로 승진하며 반려동물 신제품 개발 업무를 추가로 담당하게 됐다. 이후 적응에 어려움을 느꼈고 특히, 2020년 말부터는 사료 포장지에 적힌 함량 표기에 오류가 발생해 극도의 심적 압박에 시달렸던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결국 2020년 12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은 "회사 업무로 인한 압박보다는 업무에 대한 개인의 완벽주의 성향,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됐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유족은 이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A씨의 개인적 성향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업무상 스트레스와 결합해 우울증을 악화시켰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결론내렸다.
노동법 전문 박성우 노무사는 "원칙적으로 사고가 아닌 극단적 선택은 자해 행위라 산재 인정이 안 되나, 업무상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인지 능력이 급격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자해를 했음이 입증되면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며 "A씨에게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고 해도 승진, 업무 과중 등 개인적인 상황이 감안돼 개인의 성향에 영향을 끼쳤다면 업무상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회보험 제도의 도입 취지에 따라 직장인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프다면 기본적으로 산재로 추정해야 하나, 1차적으로 판단하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인정 여부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법 전문 이동찬 변호사(더프렌즈법률사무소)는 "산재는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의 문제인데 본인의 고의는 없어야 되며 과실이 있다면 배상책임이 경감된다"며 "극단적인 선택은 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기 때문에 손해배상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전통적인 생각이었지만 최근에는 개인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끌고 간 상황과 경위, 환경 등을 충분히 따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재의 경우 객관적인 자료와 주관적 자료, 사회관계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근무시간과 강도 등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 뿐 아니라 노동자가 주변에 얼마나 지속적으로 고통을 호소해왔는지, 사용자(사측)에서 얼마나 노동자를 케어해줬는지 등의 지표를 제시하면 산재 인정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부연했다.
전문영 변호사(법무법인 한일)는 "업무상 인과관계를 판단할 때는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다각도로 살펴야 하기 때문에 일률적인 판단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며 "인과관계를 증명할 때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할 필요까지는 없고 규범적 관점에서 타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증명됐다고 판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이라고 전했다.
김희란 변호사(법무법인 리더스)는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사망 원인이 된 질병의 주된 발생 요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업무상 재해가 질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며 "A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이 없다는 점에서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자해행위를 한 경우에 해당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