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골쇄신하겠다던 약속 어쩌고
희생 요구하자 대립 분위기 조성
민심을 속이면 딛고 설 자리 없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25일 울산 남구에서 3차례에 걸쳐 의정보고회를 가졌다.
의정보고회를 한다고 하니까 “왜 하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더란다. 그래서 “왜 시비냐”라고 반박한다는 것이겠다.
맞는 말이다. 국회의원이 의정보고회를 하는 것은 선거구 유권자에 대한 당연한 도리다.
다만 김 대표의 경우는 당위성을 주장해도 좋을 조건이 있다. △자신이 당 대표가 아니라면,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당 지도부·중진·친윤, 불출마 또는 험지출마’를 거듭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 혁신위가 김 대표의 주도로 구성된 게 아니라면, △스스로 대표적인 친윤 인사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의정보고회를 한다해서 비난 받을 이유가 딱히 없다. 이를 김 대표가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어깃장 놓듯 ∙과시하듯 ∙대못박듯 영역 표시를 하고 나선 것은 많은 국민들의 정서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분골쇄신하겠다던 약속 어쩌고
그는 지난달 11일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참패하자 바로 다음날 오전 소속의원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내용과 함께 그는 ‘분골쇄신’의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분골쇄신(粉骨碎身)은 뼈가 가루되고 몸이 부서진다는 뜻이다. 정말로 그 정도의 각오를 했다면 ‘지도부 총사퇴’ 수준의 대책이 나올 만도 했지만 ‘쇄신기구 발족’에 머물렀다. 그날 오전에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위기 대응책이 ‘혁신위원회’ 발족으로 공식화했다.
당 지도부 총사퇴→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의 전환이라는 당 안팎의 압박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서 구상되었을 터이다. 혁신위가 한시적으로라도 최고위원회의 역할과 권한을 대신한다든가, 아니면 대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조건이 없었다. 그건 최고위원회 아래, 명칭을 ‘혁신위원회’라고 하는 권고 혹은 조언 기구를 둔다는 뜻이 될 뿐이었다.
이런 기구는 ‘소문난 잔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최고위원회 산하의 조직인 만큼 월권적 결정을 내리고, 이를 지도부에 강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도부가 용인·수용할 수 있는 혁신안이라면 굳이 특별기구를 만들어 맡길 필요가 없다. 혁신위라는 것이 장식품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라고 하겠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지난 6월 20일에서 8월 10일까지 존속했던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가 상기시켜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 23일 국민의힘 김 대표는 인 위원장을 임명하고 최고위원회에서 혁신위의 자율성 독립성 보장 의지를 분명히 했다.
김 대표와 당 지도부의 이 같은 기대와 의지에 부응해서 혁신위는 쇄신안을 만들어 제시했다. 1호 혁신안이 이준석 전 대표·홍준표 대구시장 등에 대한 징계 해제였다. 지도부는 흔쾌히 이를 수용했다(혁신위는 이를 ‘화합의 묘약’이라고 판단했을지 모르나 당사자들, 특히 이·홍 두 사람은 당을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위상을 부각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희생 요구하자 대립 분위기 조성
그러나 2호 혁신안에서부터 최고위원회와 혁신위의 보조가 꼬이기 시작했다. 혁신위는 지난 3일 △국회의원 정수 10% 감축, △불체포특권 전면 포기, △국민 눈높이에 맞는 세비 책정, △현역 국회의원 평가 하위 20% 공천 원천 배제 등을 제안했다. 그런데 혁신위가 정작 방점을 둔 사항은 달리 있었다.
인 위원장이 지난 3일 혁신위 회의 후에 공식 혁신안과 별도로 밝힌 내용이다. 왜 그것을 혁신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인 위원장의 선언 형식으로 내놨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너무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하기 싫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저런 사정 다 고려하기로 들면 혁신은 시작되기도 전에 물 건너 가 버리고 만다.
아마도 인 위원장은, 명문화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역점을 둔 혁신안으로 이를 제안했다고 여겨진다. 당 지도부는 이때부터 혁신위를 못마땅하게 보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인 위원장의 제안에 대해 “혁신위에서 논의한 결과를 종합적으로 제안해오면 정식적인 논의기구와 절차를 통해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혁신위가 어떤 안을 만들든 그 가부는 당 지도부가 결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말로 들릴 법한 내용이었다. 좀 더 험하게 말하자면 인 위원장과 혁신위에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라”는 뜻이었을 수 있다.
친윤의 대표격인 인사들이 거부감을 드러냈다. “소는 누가 키우느냐”는 말로 반발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지지자들을 대거 동원해서 세과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수도권에서 출마하면 당선될 사람이 없지 않느냐고 따지는 목소리도 나왔다.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고 한 말을 “지역구 옮겨줄 테니까 거기서 싸워라”라고 들었던 것이다. “국회의원을 꼭 하고 싶다면 수도권에서 공천경쟁을 통해 출마하라”는 뜻이 아니던가?
김 대표와 인 위원장이 회동 퍼포먼스(17일)를 벌어야 할 정도로 양측 간에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혁신위 위원 몇몇이 사퇴의사를 밝혔다는 뉴스가 나왔다가 부인되는 촌극도 빚어졌다. 지금은 소강상태이지만 혁신위의 동력은 크게 약화된 게 사실이다. 그만큼 지도부나 중진 친윤 인사들은 숨 돌릴 시간을 번 셈이지만 인 위원장과 위원들의 입지는 흔들리고 있다.
민심을 속이면 딛고 설 자리 없다
힘을 가진 측이 희생과 양보를 거부하면 혁신위는 종이누각이 되고 만다. 대의(大義)는 아랑곳없이 이기심에 매몰돼, 멀쩡한 사람들을 불러다 앉혀놓고 바보로 만드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그 정도의 후유증이라면 감당할 만도 하다고 하겠지만 민심의 실망과 외면이란 쓰나미는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국민들은 국민의힘이 작정하고 속였다고 분개할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희생을 감내하겠다는 인사들이 나올 수도 있다. 원희룡 건설교통부 장관 같은 이는 25일 인 위원장을 만나 “혁신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줄”이라면서 ‘당을 위한 희생’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을 보였다. 몇 사람만 더 나와 준다면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아직은 그럴 조짐이 별로 없다. 반면에 유력자의 세 과시는 더 노골화하고 있다.
김 대표가 의정보고회에서 자랑삼아 한 말이다. 인 위원장이 “윤 대통령 측에서 소신껏 끝까지 거침없이 하라는 신호가 왔다”고 하자 “당무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대통령을 당내 문제와 관련해 언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못마땅해 하던 김 대표다. 윤 대통령과의 대화‧의논의 통로는 자신이 독점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하고, 그러니 어쩌라는 것인지도 같이 말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선거 승리를 위해 기울여야 하는 정성과 노력에 ‘적정량’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최후의 땀 한 방울까지 다 바친다는 각오와 실천 위에서만 승리를 기약할 수가 있다. 지난 21대 총선의 참패가 국민의힘에 무엇을 강요해 왔는지 일일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민주당의 의정 농단’이라는 수모를 되풀이 겪지 않으려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대의를 위한 희생에는 갚음이 있을 것임을 의심치 말고!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