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대마도를 검색하면 약 1,551건의 원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마도의 크기와 위상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많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록의 상당수는 왜구와 연결되어 있다. 고려 충정왕 2년인 서기 1350년 2월,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인 고성에 대규모의 왜구가 침입한다. 그리고 거제도를 쑥밭으로 만들고 사라진다. 물론 고려군의 반격에 3백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하지만 왜구들은 이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400회에 가까운 침략을 반복한다.
처음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해안가에 상륙해서 근처의 마을을 약탈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심지어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개경을 넘보려고 시도까지 했다. 덕분에 우왕은 왜구를 피해 수도를 옮기려는 천도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최영과 이성계의 맹활약과 최무선이 만들어낸 화약, 그리고 필사적으로 양성한 수군 덕분에 왜구의 기세는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된다. 왜구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는 종종 침략자들을 단순히 소규모 해적단 정도로 오해한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 조선과 명나라를 공격한 왜구들은 사실상 정규군에 버금가는 전력을 자랑하는 군대였다. 중앙 집권체제를 갖춘 고려와 명나라와는 달리 지방의 다이묘들이 실권을 장악한 일본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왜구를 등장시킨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라는 그림자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이성계는 불패의 명성을 자랑하는 장수였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면서 다양한 적들과 다양한 지역에서 싸웠지만 눈에 띄는 패배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 특히 왜구와의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는데 황산에서는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왜군들을 물리치고 적장인 아지발도를 사살하기도 했다. 그런 명성에 힘입어 조선을 건국했지만 왜구들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여전히 약탈을 감행했다. 자칫하면 새로 건국한 조선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고, 민심이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이성계는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힌트는 관음포 해전에서 47척의 전선으로 120여 척의 왜선들을 물리친 정지 장군이 냈다.
정지 장군은 일본인들이 모두 왜구는 아니고 가장 핵심은 대마도와 일기도이기 때문에 두 섬을 쳐서 박멸해야 왜구들을 박멸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마도와 일기도는 왜구들의 근거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중간 거점이자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이곳으 공격해서 왜구들의 활동 영역을 제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의 의견은 고려의 창왕 시절인 서기 1389년 제1차 대마도 정벌로 현실화 된다. 박위가 이끄는 고려 수군은 100척의 전선에 나눠타고 대마도를 기습공격한다. 그리고 300여 척의 왜선을 불태우고, 포로로 붙잡힌 100여명의 백성들을 구해서 돌아온다. 자세한 경과와 과정이 적혀 있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그건 2차 원정 기록에 비하면 배부른 소리였다.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기세는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이 건국한 지 5년째인 1396년 8월에는 120척의 왜선들이 나타나서 동래와 기장 등을 기습해서 약탈을 저지르고 방어하기 위해 맞서 싸우던 수군 장수를 살해하기도 한다. 분노한 이성계는 그해 12월 3일에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다.
총지휘관인 김사형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고, 남재는 정도전의 측근이자 역시 개국공신인 남은의 형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김사형에게 지휘권의 상징은 부월을 내려주면서 격려하고 남대문 밖까지 전송해주었다. 같은 달 22일에는 궁온을 내려주었는데 임금이 하사한 술을 의미한다. 원정군을 이끌고 떠난 김사형은 다음 해인 서기 1397년 1월 30일에 돌아오는데 이때도 임금인 이성계가 지금의 동대문인 흥인문까지 나가서 맞이했다. 그리고 조준과 정도전 등에게 명해서 김사형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주도록 하고 관복에 두르는 띠인 서대를 하사하면서 노고를 치하했다.
의문점은 출정과 귀환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는데 대마도와 일기도를 실제로 공격했는지 아니면 그냥 돌아왔는지에 대한 부분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혹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해서 기록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랬다면 김사형을 비롯한 지휘부를 처벌한 기록이 남았어야 했는데 오히려 잔치를 베풀어주고 서대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3차 원정에서 박실의 패배를 숨기지 않고 기록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뭔가를 감춘 것 같지도 않다. 아울러, 원정이 진행 중이었을 12월 말에 몇 명의 왜구가 칼을 마치면서 항복했고, 몇 달 후인 4월에는 나가온이라는 왜구가 24척의 배와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한다. 혹시나 김사형의 대마도와 일기도 정벌과 관련되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다. 합리적으로 추측해보자면 김사형이 전선을 이끌고 무력시위를 단행하고, 겁을 집어먹은 왜구들이 항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명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