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398년, 태조 이성계가 임금의 자리에 오른지 7년째 되던 해의 조선왕조실록 8월 26일자 기사다. 사건이 벌어진 해의 갑자가 무인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무인년에 종사를 바로잡았다는 뜻의 무인정사(戊寅定社)라고 불렸다. 우리는 보통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르고, 만약 이 반란이 실패했다면 방원의 난 정도로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쿠데타였기 때문에 반란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일은 없다. 썩어빠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명분이 무색하고 7년 만에 권력을 놓고 왕실이 내분에 빠진 것이다. 사실,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한반도에서 태어난 장수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수 십년간 남북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여진족과 왜구는 물론, 홍건적들을 격파했으며, 크고 작은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다 가별치라고 부르는 동북면 주민들로 구성된 친위부대를 이끌었는데 소라고둥을 부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다. 그래서 전장의 침략자들은 소라고둥 소리를 들으면 이성계와 가별치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두려움에 떨었다. 평생 한 번도 지지 않았던 이성계의 유일한 패배가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와병 중이긴 했지만 개국공신인 측근들은 물론 아들들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또 다른 아들들의 손에 말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에 혈육의 정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의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이성계에게는 패배 이상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은 왜 일어났을까? 같은 기사에 실린 내용에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할 당시 이성계의 나이는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당시 평균 수명을 이미 넘어선 상태였고, 아들들이 장성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가 언급되어도 이상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이제 막 건국한 국가에서 후계자를 빨리 세워서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어린 서자를 세자로 세우려고 했을까? 당시 이성계에게는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와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가 있었다. 향처는 신진사대부가 과거 급제등을 통해 개경에 진출하기 전에 고향에서 결혼한 아내를 뜻하고 경처는 개경에 올라와서 다시 맞이한 부인을 얘기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똑똑하게 야심찬 젊은 관리를 사위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 개경의 권세가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관리 역시 연줄을 제대로 잡아서 출세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처들이 탄생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불법인 중혼이가 당시에도 제도상으로 문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성계는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여섯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고, 경처인 신덕왕후 강씨에게서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기준이라면 두 번째 결혼한 신덕왕후 강씨는 첩이 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서자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오히려 나중에 혼인한 경처 쪽이 더 위세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성계 같은 경우도 신덕왕후 강씨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다음 후계자로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낳은 막내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런 결정은 장성한 상태에 조선의 건국에 공로를 세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과 측근 세력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특히,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라고 지시한 이방원이 더욱 더 강력하게 반박했다. 아버지를 위해 손에 피까지 묻혔는데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것은 물론, 배다른 동생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목숨은 정말 보장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불만을 품었던 이방원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절호의 기회를 포착했다.
당시 이성계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정도전을 비롯한 측근들이 궁궐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이 때, 경복궁 바로 옆 송현에 있는 남은의 첩 집에 모인 것이다. 아마, 잠깐 궁궐을 나와서 회포를 풀기 위해 술 한잔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소식을 들은 이방원은 번개같이 사병을 모집해서 지금의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삼군부로 향해서 그곳을 장악했다. 같은 형제들과 이성계의 측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이방원의 이런 움직임에 병에 걸린 이성계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 송현을 지나가던 이방원은 근처에 남은 첩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곳에 모인 정도전 일파를 공격하기로 한다. 옆집으로 도망친 정도전은 끌려 나와서 목이 베였다. 상당히 비굴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실록의 기사를 믿고 싶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를 빈다고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연히 지나갔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이방원의 집은 지금의 서촌에 있었고, 거기서 삼군부 사이에는 송현동이 없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아들이자 배다른 동생들도 모두 죽이면서 제1차 왕자의 난은 막을 내린다. 하지만 1이라는 숫자에서 알 수 있듯, 왕자의 난은 한번 더 발생한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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