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 단발의 총소리와 함께 객석은 완벽한 어둠이 드리운다. 이후 새하얀 빛을 내뿜는 천장의 큰 원형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관객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모인다.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국립극단의 연극 ‘헤다 가블러’는 이렇게 시작된다.
“고급” “정말 대단한 여자” “늘 멋지고, 예쁘지”라는 남편 예르겐 테스만과 고모 율리아네 테스만의 대화에서 나타나는 헤다 가블러의 모습이다. 그런데 모두의 선망의 대상인 헤다 가블러는 정작 “내 시대가 가버렸다”며 “이제 남은 건 죽도록 지루해 하는 것”이라고 토로한다.
부유한 장군의 딸 헤다 가블러는 충동적인 결혼 후 지루함과 권태로움을 느끼는 인물이다. 극은 6개월 동안의 긴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36시간 만에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담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위태롭게 걷는 헤다의 추락은 이혜영을 통해 세련되고 우아하게 완성됐다.
특히 권태에 시달리던 헤다가 우연히 전 연인 에일레트 뢰브보르그의 학문적 성공 앞에 질투와 혼란을 느껴 에일레트의 원고를 불태우는 장면은 헤다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품에선 이 감정을 ‘아이를 잃은 엄마’의 감정을 투영했다. 극중 헤다는 원고를 품에 안고 아이를 대하듯 어르고 달래고, 자장가를 부른다. 화롯불에 원고를 태운 이후엔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소리치기도 한다.
헤다 가블러는 2012년 초연에서 이 역을 맡았던 배우 이혜영이 다시 섰다. LG아트센터에서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헤다 가블러’와 공연 시기가 겹쳤고, 이영애의 연극 복귀작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비교가 이뤄졌다. 이영애는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헤다이면서 어딘가 차가운 헤다를 연기했다.
반면 이혜영은 소녀 같은 발랄함을 가지고 있지만, 극이 중반으로 들어설수록 특유의 카리스마와 서늘함이 들어선 다층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헤다의 결핍과 억압, 욕망과 질투를 특유의 날선 감각으로 풀어냈다.
또 LG아트센터와 국립극단의 ‘헤다 가블러’가 극명하게 다르게 표현한 부분은 무대 연출이다. LG아트센터가 무대 소품을 최소화하고 라이브캠을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했다면, 국립극단은 무대에 소파와 의자, 테이블, 조각상 등으로 빼곡하게 채우면서 히피즘이 성행했던 197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이를 고증했다.
무엇보다 박정희 연출은 초연에서 ‘신이 되려 했던 헤다’를 그렸다면, 이번 재연에선 ‘인간에 가까운 헤다’를 선택하면서 현 사회에서 21세기판 헤다가 존재한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자아의 본질을 찾고자 헤매는 오늘날의 헤다들에게 우리는, 그리고 사회는 어떤 손을 내밀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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