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배아픔 참고 배고픔 해결…공산주의, 배고픔 참고 배아픔 해결
배고픔은 배아픔을 배려하고 배아픔은 배고픔을 고려해야 하는 시대
배아픔 문제를 해결하려면 배고픔을 해결하는 속도부터 가속해야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을까.
하버드대학교 대니얼 길버트 교수가 학생들을 상대로 했던 유명한 설문조사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은 월급 250만원을 받는데 나만 500만원을 받는 직장이다. 둘째, 나는 1000만원을 받는데 다른 사람들은 2000만원을 받는 직장이다. 둘 중 어디를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첫째를 골랐다고 한다. 1000만원은 500만원보다 2배나 많은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을 느끼는 상황이 싫었다는 설명이다.
어느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에게 악마들이 방해하려고 들러붙었다. 악마들은 스님이 배가 고프면 수행을 그만둘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주변의 먹을 것을 모조리 없앴다. 하지만 스님은 끄떡없었다. 악마들은 다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스님, 옆 사찰에 스님과 같이 출가했던 모 스님께서 이번에 종정(宗正)이 되셨다고 합니다”라고 속삭였다. 그랬더니 스님의 안색이 파랗게 변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어낸 이야기지만, 배고픔은 참아도 배아픔은 참기 어려움을 보여 주는 스토리다.
배고픔은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느끼는 결핍 상태지만, 배아픔은 자신의 소유에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소유를 보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심리다. 배고픔이 육체의 고통이라면 배아픔은 영혼의 번뇌다. 배가 고프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아이들은 대성통곡을 하지만, 배가 아프면 시기·질투·좌절·체념·원망 등 온갖 부정적이고 오묘한 감각이 꿈틀거린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우리 속담이나 ‘가까운 친구의 불행 속에는 기분 나쁘지 않은 무엇이 있다’라는 칸트의 말도 모두 배아픔을 보여 주는 말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한국 현대사를 ‘배고픔(Hunger)’과 ‘배아픔(Envy)’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배고픔과 배아픔 중에서 무엇을 먼저 없애야 하느냐는 입장의 차이였다.
배고픔이 성장에 주력하는 반면 배아픔은 분배에 집중한다. 배고픔이 자본주의와 우파의 사상이라면 배아픔은 공산주의와 좌파의 철학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배아픔을 참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체제이고, 공산주의는 배고픔을 참고 배아픔을 해결하는 체제라는 말도 있다. 배고픔이 개인의 열정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반면, 배아픔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더 따진다.
한국 사회 배고픔의 이슈는 박정희 대통령 때가 절정이었다. 그는 배고픈 대한민국을 살려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더십과 전략으로 거지 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든 역대 최고 대통령이다.
문제는 박정희 대통령이 배고픔을 급히 해결하는 동안, “나는 왜 청계천 뒷골목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미싱을 돌려야 하나?” “구로공단에서 숨 막히는 잔업에 시달리고 산재(産災) 위험을 겪는데 쥐꼬리만 한 월급밖에 받지 못하나”라는 하소연이 커졌다. 거기에 곧장 좌파와 운동권이 달라붙어 의식화 작업을 진행했다. 의식화란 배아픔을 체계적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배아픔이 가장 무서울 때는 정의감과 결합할 때다.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하는 ‘정의감의 화신’이라는데 무엇이 겁나겠는가. 다만 함정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가롯 유다는 어느 날 마리아가 나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발에 붓는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당시 그 향유의 가격은 최소 300데나리온, 요즘 기준으로 3000만원이 넘는 고가품이었다. 가롯 유다는 순간 정의감의 화신이 되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하는가”라며 마리아를 나무랐다. 하지만 성경은 돌직구를 던진다. “가롯 유다가 그렇게 말함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라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있는 돈을 훔쳐 가곤 했다”라고 직격했다. 배아픔의 철학을 내세우며 가난한 사람의 이웃인 것처럼 행세하는 인물이 많다. 하지만 그들 중에 위선자가 많음은 아이러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래 배고픔의 철학을 수용하지 않은 배아픔의 철학이 난무했다. 그들은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는 자본주의가 낳은 해악”이라며 배아픈 사람을 집중적으로 포섭했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억압으로 수천만 명을 굶겨 죽이며 모두가 가난한 평등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스탈린의 딸인 스메틀라나 알릴루예바는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라는 말도 했다.
단순히 배가 고프다고 폭동이 잘 일어나지는 않으나 만일 거기에 배를 아프게 만드는 불똥이 하나만 튀면 거대한 폭동으로 변질된다. 대다수 주민이 배고픔에 시달리는 북한에 대규모 폭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배아픔을 촉발할 만한 외부 정보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잘 느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얘기다.
인간의 생리와 본성을 고려하면, 이제 우파든 좌파든 누가 국가지도자가 되어도 배고픔과 배아픔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배고픔은 배아픔을 배려하고 배아픔은 배고픔을 고려해야 하는 시기다. 왜냐하면 세계 경제와 한국경제 모두 성장이 한계에 왔고 그러면서 분배의 몫 역시 한계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산업이 성숙기나 쇠퇴기에 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8월 12일 수정 발표한 올해 한국경제 성장률은 0.8%에 그칠 전망이다. 0%대 성장 시대가 우리 곁에 온 것이다.
이제는 노조도 배고픔과 배아픔을 동시에 고려할 시기가 왔다. 필자는 군산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GM 공장이 경영 실패에다 노조의 무리한 요구까지 겹쳐 문을 닫는 바람에 지역경제가 위기를 맞은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다. 경영실적이라는 먹이를 함께 키워 놓은 다음에 나누자고 요구해야 하는데, 먹이를 키우지도 못한 상태에 먼저 나누겠다고만 하면서 안타까운 상황이 된 것이다.
지금 노란봉투법(쟁의행위 범위 확대와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제한을 골자로 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을 비롯하여 노조 친화적인 법안들이 속속 실행되는 상황이다. 노란봉투법에는 배아픔의 철학이 듬뿍 담겨 있다. 오죽하면 주한(駐韓) 미국·유럽 상공회의소에서 노란봉투법이 실행되면 한국에서 철수할지 모른다고 우려했을까.
이재명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소년공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 배고픔과 배아픔을 진하게 경험했다. 배고픔과 배아픔의 갈등에 대한 해결책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대통령 선거 때 이재명 후보 찬조연설을 했던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자신이 노력하고 부를 축적하여 이기심을 우선 만족시킨 뒤 이런 패턴을 가족, 회사, 사회, 국가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국가발전의 원리”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그래서 배아픔의 문제를 그나마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배고픔을 해결하는 속도를 가속화(加速化)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국가 경제를 2배로 성장시켜 놓은 상태에서 분배를 따지는 상황이, 경제성장이 2분의 1로 쪼그라든 상태에서 분배를 논하는 경우보다는 훨씬 쉽다.
글/ 최홍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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