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발걸음이 곧 서사가 된다…이머시브 끝판왕 ‘슬립노모어’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08.25 15:26  수정 2025.08.25 15:26

공연의 막이 오르면 객석의 불이 꺼지고, 관객은 숨을 죽인 채 무대 위 배우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전통적인 연극의 문법이다. 하지만 옛 대한극장 건물을 통째로 1930년대풍의 ‘매키탄 호텔’이라는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킨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에선 이런 문법이 통하지 않는다. 여기선, 관객과 무대의 경계가 없고, 정해진 좌석과 시나리오의 흐름도 거부한다.


ⓒ미쓰잭슨

물론 지금까지 국내에서 관객 몰입, 참여 형식인 ‘이머시브 공연’이 여러 차례 소개됐지만, ‘슬립 노 모어’는, 분명 새로운 차원의 ‘끝판왕’ 격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공연의 핵심은 단순히 ‘보는’ 행위를 넘어, 관객이 무려 7층 규모의 호텔에 섬세하게 꾸며진 공간들 탐험하고,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며,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해 나가는 데 있다.


기본 뼈대는 배경을 1930년대 스코틀랜드로 옮긴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다.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히치콕 스타일의 서스펜스로 재구성해, 세 마녀의 예언을 듣고 왕좌의 욕망에 사로잡힌 맥베스가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2003년 영국 실험 극단 펀치드렁크가 런던에서 선보인 뒤 2007년 미국에 진출해 2011년부터 지난 1월까지 장기 상연했다. 2016년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 오고 있다.


21일 공식 개막한 ‘슬립 노 모어 서울’에서 관객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더듬더듬 벽을 짚어가며 공연장에 들어선다. 객석과 무대의 구분은 없다. 배우와 관객을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은 ‘가면’이다. 입장 전 건네받은 하얀 가면을 쓰는 순간 관객들은 호텔의 복도를 배회하면서 등장인물의 가장 비밀스러운 순간을 엿보는 목격자가 된다.


또 자신의 가장 본능적인 호기심과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배우들의 격정적인 몸짓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거나,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어보고 편지를 읽는 등의 행위도 모두 허용된다. 가면 뒤에 숨어 타인의 비극과 욕망을 탐닉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극의 일부로 깊숙이 스며들게 되는 셈이다.


ⓒ미쓰잭슨

‘슬립 노 모어’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바로 ‘매키탄 호텔’이라는 공간 그 자체다. 7개 층에 걸쳐 100여 개의 방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공간은 단순한 무대 배경을 넘어, 그 자체가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기능한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공동묘지, 약초와 동물이 박제된 상점, 금방이라도 누군가 돌아올 것 같은 침실, 피 묻은 욕조가 놓인 방 등 각 공간은 극도의 디테일로 채워져 있다. 손때 묻은 가구와 빛바랜 편지, 책상 위에 놓인 소품 하나하나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재해석한 이 공연의 서사를 묵묵히 증언한다.


관객은 이 미로 같은 호텔을 자유롭게 탐험하며 자신만의 관람 동선을 만들어간다. 정해진 길은 없다. 어떤 관객은 맥베스의 뒤를 쫓아 그의 타락과 고뇌를 함께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관객은 레이디 맥베스의 광기 어린 독무에 매료되어 그녀의 곁을 지킬 수도 있다. 혹은 특정 인물을 따르는 대신,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집중하며 호텔 곳곳에 숨겨진 단서들을 탐색할 수도 있다. 이야기는 호텔의 여러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관람으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객의 ‘선택’이 중요해진다. 내가 어떤 인물을 따라가고 어떤 공간에 머무르기로 선택하는지에 따라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이 완성된다.


배우들은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몸짓과 춤, 그리고 강렬한 표정으로 모든 감정을 전달한다. 이들의 에너지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관객은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그들의 격정적인 행보를 뒤쫓는다. 때로는 배우가 갑자기 다가와 손을 잡고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이끌어,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장면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대일 퍼포먼스는 가면을 쓴 유령으로 존재하던 관객을 순간적으로 극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며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맥베스’의 기본 줄거리와 등장인물 그리고 매키탄 호텔의 층별 구조 등 관람 전 예습이 있다면 공연을 더 효과적으로 즐길 수 있다. 중요 내용을 파악하고 싶은데 흐름을 놓쳤다면, 맥베스를 찾는 것도 방법이다. 사건은 주인공인 맥베스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다만 ‘대세’에 따르는 것보다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추천한다. 매키탄 호텔에선 절대 ‘의미 없는 헛걸음’은 없다.


폐막일은 미정이며, 공식 발표 전까지 오픈런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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