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살인자 리포트’, 관객이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영화”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09.22 11:55  수정 2025.09.22 11:55

2002년 영화 ‘H’로 데뷔한 정성일은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내공을 다져왔다. 영화와 드라마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쳤지만,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작품은 2022년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였다. 극 중 하도영 역을 통해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절제된 감정을 동시에 보여주며 강렬한 존재감을 남긴 그는 이후 디즈니플러스 ‘트리거’, 넷플릭스 영화 ‘전,란’ 등 굵직한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며 대세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드디어 ‘살인자 리포트’로 스크린 주연을 맡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연쇄살인을 담담히 고백하는 정신과 의사 영훈 역을 맡은 그는 특종을 좇는 기자 선주(조여정 분)와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며, 시선과 호흡만으로도 인물의 양면성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대부분의 서사가 두 인물의 대화로만 펼쳐지는 제한된 구조 속에서 정성일은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며, 배우로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입증해 보였다.


정성일은 이번 작품을 “연극과 영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세트 안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현돼 있어, 마치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듯 긴 호흡으로 연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장면이 세트 안에서 그대로 펼쳐져 있었어요. 저는 그 공간에 들어가 인물로서 연기만 하면 됐죠. 스태프들이 완벽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집중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덕분에 이질감 없이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극 중 인터뷰 장면에서 영훈은 기자 선주를 몰아세우며, 마치 실험실에서 심리 게임을 벌이듯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관객이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이어지는 공방은 두 인물의 관계가 어디로 향할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이야기가 후반부에 접어들며 비밀이 드러나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인터뷰 장면은 선주를 끝까지 몰아세우기 위한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웠어요. 하지만 후반부, 치료를 권유하는 장면에서 영훈은 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하며 손을 내미는 의사로 다가가죠. 그때는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선주와 마주하게 됩니다.”


정성일에게 이번 촬영은 계산된 연기라기보다 상대와의 실시간 호흡에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가까웠다. 대본 속에서만 살아 있던 기자와 살인자의 관계는 현장에서 조여정이 만들어내는 리액션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됐고, 두 배우가 서로의 템포를 읽으며 미세하게 밀고 당기며 완성됐다.


“처음에는 기자와 살인자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캐릭터를 고민했어요. 하지만 실제 촬영에 들어가 보니 모든 건 백선주 기자 역의 리액션과 액션에 따라 현장에서 완성됐습니다. 정말 잘하는 배우와 맞붙다 보니, 몰아붙였다가도 너무 깊게 들어가면 도망칠 것 같아 숨 쉴 공간을 열어주고, 다시 밀어붙이는 등 이런 합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촬영은 정성일, 조여정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대부분 마주 앉아 진행됐다. 마치 무대 위 공연처럼 긴 호흡을 유지해야 했고, 이는 정성일에게도 낯설지만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두 배우가 한 공간에만 있다 보니 마치 공연을 하듯 긴 호흡으로 연기할 수 있었어요. 명확히 영화인데도, 연극적인 묘미가 함께 살아 있는 경험이었죠. 카메라 감독님이 정말 많은 앵글을 준비해 주셔서, 한 공간이지만 지루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정성일이 가장 어려워했던 점은 장면의 밀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백선주 기자와의 팽팽한 심리전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나 조명은 바뀔 수 있지만, 두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야 해요. 그 밀도를 유지하는 게 제일 큰 숙제였죠. 하루 촬영하고 나오면 정말 기진맥진했어요.”


영훈의 외적인 모습은 감독의 세심한 설계에서 비롯됐다. 의상부터 머리의 광택까지, 모든 디테일이 그의 성격과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


“밝은 톤의 정장을 입히거나 머리를 반짝이도록 연출하는 등, 감독님이 하나하나 의도하셨어요. 정리정돈된 이미지를 통해 영훈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죠. 덕분에 저는 피팅만 하고도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훈은 법과 제도에 기대지 못한 채 왜곡된 공감 속에서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캐릭터다. 정성일은 이러한 복합적인 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인물의 감정을 끝까지 세심하게 붙들었다.


“영훈은 법에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결국 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 무너진 인물이에요. 잘못된 공감력에서 비롯된 행동이죠. 그가 선주에게 치료를 권유하는 건 사실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 그 복합성을 유지하려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살인자 리포트’는 겉으로는 살인 사건의 진실을 따라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인물의 치열한 대화 속에서 관객을 점점 더 깊은 심리전으로 끌어들인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지며, 관객은 어느새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정성일은 바로 이 부분이 ‘살인자 리포트’의 미덕이라고 짚었다.


“영화가 끝나도 질문이 남는 작품이에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만들죠. 보는 사람마다 다른 답을 갖게 될 거예요. 그게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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