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셀럽, ‘인간 마네킹’ 에서 ‘관계’로…패션위크가 원하는 진짜 앰버서더 [김희선의 글로벌 K컬처 이야기④]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10.03 14:00  수정 2025.10.03 14:00

올해 밀란 패션위크의 공기는 유난히 묵직했습니다. 아르마니의 타계, 주요 하우스의 디렉터 교체, 변동성 큰 시장 상황이 겹치며 산업이 다음 장을 준비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한국 셀럽들은 더 이상 ‘초대 손님’이 아니라 장면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선명했습니다. 프라다·보테가 베네타·돌체앤가바나·펜디. 플래시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 움직였고, 브랜드 공식 채널의 첫 줄 해시태그를 한국 이름이 채웠습니다. 밀라노와 파리의 프런트로는 이제 ‘K’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milanofashionweek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패션위크 현장에서 일하면 할수록 제게는 늘 2%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는 한국 셀럽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경향의 이야기입니다. 쇼장과 애프터파티에서 한국 스태프와 경호 인력의 안전한 원 안에만 머무르는 ‘우리만의 리그’, 포토콜과 인터뷰를 끝내면 곧장 숙소로 향하는 폐쇄적인 동선, 공간과 사람의 이야기를 체험하기보다 SNS용 장면 수확에 치우친 행동 패턴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 결과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전 세계 패션씬에서 관계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망설임이 앞섭니다. 그래서 종종 “2시간짜리 신데렐라”, “인간 마네킹”이라는 비유가 따라붙습니다.


왜 이런 경향이 만들어질까요. 언어와 문화의 문턱, 노출 컷과 ‘좋아요’ 수치를 KPI로 삼는 결과 중심의 구조, 안전을 위한 과도한 통제, 시차도 풀기 전 쇼–행사–공항으로 이어지는 동선, 그리고 국내에서 유효했던 ‘인증 중심’의 성공 공식을 글로벌 무대에도 습관처럼 이식한 관성까지 여러 요인이 겹쳐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해외 패션 씬과 소통해 오며 저는 이 지점이 늘 아쉬웠습니다. 동시에, 이 부분만 조금 더 강화된다면 한국 셀럽들이야말로 진정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 믿습니다.


무엇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요. K-셀럽이 그저 ‘옷을 입어주는 예쁜 사람’이 아니라, 하우스의 미학과 서사를 자신의 언어로 해석해 환류시키는 문화적 동반자가 될 수는 없을까요. 브랜드의 아카이브와 디렉터의 역사, 지난 컬렉션과 이번 컬렉션의 메시지를 사전에 공부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글로벌 에티켓과 스몰토크, 식탁의 언어, 인문적 교양은 이제 매너를 넘어 직업적 역량이 됩니다. 셀럽 개인에게는 ‘완수’의 태도에서 ‘향유’의 태도로의 전환을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패션을 진심으로 즐기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호기심, 타인의 작업을 바르게 칭찬하고 한 가지를 더 묻는 용기. 이 작은 제스처가 다음 시즌의 초대장을 바꾸고 협업의 폭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장에서는 경호의 반경을 조금만 낮추고, 포토콜 이후 20분 정도의 관계 루틴을 동선 안에 끼워 넣는 것도 상상해 봅니다.


평가의 기준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재설정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노출 수치나 계약 여부만으로는 셀럽의 영향력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헐리우드나 유럽의 많은 셀럽은 쇼 참석 이후에도 디자이너와 연락을 이어가거나, 아틀리에를 찾아 장인과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공고히 합니다. 이런 꾸준한 교류와 신뢰가 결국 브랜드 캠페인, 글로벌 앰버서더 계약으로 이어지고, 더 좋은 자리를 보장합니다. 좋은 인상, 진심 어린 애정, 깊은 소통, 그리고 자기만의 소화와 재해석이 함께할 때 비로소 셀럽은 브랜드의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진정한 동반자가 됩니다.


그렇기에 ‘관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함께 가져가는 것이 의미 있습니다. 첫 만남 이후 2주 내 팔로업 미팅 여부, 공동 콘텐츠 제작 건수, 현지 창작자와의 협업 착수, 다음 시즌 초청의 질적 변화 등은 모두 점검 가능한 기준입니다. 이는 단순히 보여주기용 활동이 아니라, 브랜드가 바라는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관계는 우발이 아니라 설계 가능한 자산이고, 호기심과 예의는 그것을 증폭시키는 기술입니다. K-셀럽이 이러한 관계를 만들어 갈 때, 그들은 일회성 이슈메이커가 아니라 산업의 흐름을 움직이는 인플루언서이자 대한민국 소프트파워의 든든한 자산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인증의 시대를 지나 관계의 시대로. 다음 장면의 주인공은 여전히 우리이되, 이번에는 ‘함께’라는 이름으로 무대의 중심에 서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봅니다.


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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