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업 깨졌다"…공개매수로 터진 서막[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1년-상]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입력 2025.10.06 09:00  수정 2025.10.06 09:00

추석 직전 영풍·MBK, 고려아연 공개매수 전격 선언

최윤범 회장, 자사주 매입으로 맞불…쌍방 공개매수 전개

투자 논란·적대적 M&A 공방 속 70년 동업 체제 균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왼쪽)과 장형진 영풍 고문. ⓒ데일리안 박진희 디자이너

지난해 추석 연휴 직전, 한국 자본시장에서 전례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세계 최대 아연·제련 기업 중 하나인 고려아연을 둘러싸고 70년 넘게 공동 경영을 이어온 두 가문이 정면 충돌에 나선 것이다.


고려아연은 1974년 설립된 이후 아연·연·금·은 등 비철금속 제련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회사다. 매출 규모만 수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제련 강자지만, 경영 구조는 특이했다. 지분을 보유한 모회사 영풍(장씨 일가)이 최대주주로 자리해왔고 실제 경영은 최씨 일가가 맡아온 ‘분업 체제’였다. 장씨와 최씨 두 가문은 70여 년간 동업 관계를 유지하며 회사를 이끌어왔고 이는 한국 재계에서도 보기 드문 독특한 거버넌스로 꼽혔다.


그러나 지난해 초 열린 고려아연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배당안과 정관 변경안을 두고 영풍과 고려아연이 사상 처음으로 표 대결을 벌였다. 표면상 배당정책을 둘러싼 갈등이었지만, 최대주주와 경영진 간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뒤이어 고려아연은 영풍과 수십 년간 이어온 ‘원료 공동구매 및 공동영업’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장씨와 최씨 두 가문의 공동 경영을 상징했던 서린상사의 경영권도 고려아연이 가져왔다. 서린상사는 원자재 조달과 유통을 담당해온 핵심 계열사로, 이사 선임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회사 내 권력 균형이 크게 달라졌다. 고려아연이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공동 경영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불투명한 투자' vs '약탈적 M&A'

갈등은 지난해 9월 영풍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폭발했다. 지난해 9월12일 영풍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지분을 대규모로 공개매수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13일, 영풍과 MBK의 특수목적법인(SPC)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는 금융당국에 공개매수 신고서를 제출하며 본격적인 절차에 돌입했다. 영풍-MBK 연합은 불투명한 투자와 지분 희석으로 주주가치가 훼손됐다며 지배력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영풍-MBK 연합은 ▲지인이 세운 신생 펀드 원아시아파트너스에 5600억원을 투자한 점 ▲해당 펀드가 SM엔터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된 점 ▲완전자본잠식 상태였던 미국 전자폐기물 업체 이그니오홀딩스를 5800억원에 인수한 점 ▲한화. 현대차그룹 등과 체결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와 자사주 맞교환으로 약 16% 지분이 희석된 점 등을 문제로 삼고 이런 결정들이 기존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고 회사의 건전성을 흔들었다고 주장했다.


곧바로 최윤범 회장도 자사주 공개매수로 맞불을 놨다. 이로써 한국 시장에서는 보기 드문 쌍방 공개매수라는 국면이 펼쳐졌다.


고려아연 이사회는 약 2조7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해 전량 소각하겠다고 발표하며 주주가치 제고를 강조했다. 더불어 베인캐피탈을 공동매수자로 참여시켜 단순 방어가 아닌 재무적 투자와 장기 성장 전략을 뒷받침하는 조치라는 점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싸움은 단순한 지분 경쟁을 넘어 ‘쩐의 전쟁’으로 불렸다. 영풍-MBK 연합이 공개매수 가격을 주당 66만원에서 75만원, 83만원까지 차례로 올리자 고려아연도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을 89만원까지 끌어올렸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조 단위 자금이 오가는 가격 경쟁이 펼쳐지면서 시장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금융감독원장까지 나서 “시장 질서를 해치는 불공정거래가 발생할 경우 엄정 조치하겠다”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최 회장 측은 영풍-MBK 연합의 공개매수 자체가 단순한 지배력 회복 시도가 아니라 외부 자본과 결탁한 적대적 M&A 시도로 규정하며 경영권 침탈 우려를 제기했다. 일부 정치권과 지역 사회에서도 MBK 펀드에 중국계 자금이 일부 포함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기술 유출과 국제 통상 리스크를 경고했다.


최 회장은 자사주 매입 결정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자사주 공개매수는 회사와 주주, 협력업체, 지역사회를 지키기 위한 간절한 결정”이라며 “MBK와 영풍의 공개매수는 적대적 M&A 시도로, 고려아연의 미래와 국가 기간산업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법원이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을 기각하면서 공개매수의 적법성과 합리성이 확인됐다”며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영풍-MBK 연합은 MBK가 한국 금융당국의 규제를 받는 한국계 사모펀드이고 중국계 자금 비중도 제한적이어서 기술 유출이나 경영 개입 우려는 과도한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처럼 지난해 추석을 기점으로 시작된 고려아연 분쟁은 단순한 투자 논란을 넘어 최대주주와 경영진 간 힘겨루기로 확전됐다. 균열이 드러난 동업 체제는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갈등은 이후 주주총회와 법정 공방으로 이어지며 한층 치열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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