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이 영화 '어쩔수가없다'에서 이병헌은 평생을 바친 회사에서 해고된 뒤, 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 경쟁 속에서 동료들을 제거해 나가는 인물 만수를 연기했다. 단순히 해고 노동자의 초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불안정한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불안을 담아낸 캐릭터다.
지난 달 24일 개봉 직후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른 '어쩔수가없다'는 15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공동겨입구역' JSA, '쓰리, 몬스터'에 이어 박찬욱 감독과 이병헌이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기대를 모았다.
그가 주저 없이 합류를 결정한 배경에는 작품이 지닌 장르적 매력이 있었다. 웃음과 긴장이 공존하는 블랙 코미디야말로 이병헌이 오래전부터 끌려온 영역이었다
"제가 기본적으로 블랙 코미디 장르를 선호해요. 계속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그런 가운데 그게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가 그 이면에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에게 블랙 코미디는 단순한 장르가 아니라, 배우로서 웃음과 진지함을 동시에 다뤄야 하는 도전이기도 했다.
"제가 시나리오 받고 읽으면서 많이 웃었는데 감독님이 의도하신게 맞는지 아니면 나만 느낀건지 알고 싶어서 '웃겨도 되냐' 이런 식으로 여쭤봤어요. 왜냐하면 특히 코미디, 블랙코미디 등 유머가 있는 영화는 너무 의도하면 역효과 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웃기려고 애쓰가 더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건 배우들이 경계하는 부분이거든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웃기려고 작정하고 달려들며 연기하진 않았어요."
촬영 현장에서는 작품의 리듬과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직접 아이디어를 보탰다.
"사실 감독님은 제 아이디어를 다 받아들일 분이 아닌데 이렇게 계속 의견을 제시하다 모든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하더라고요.(웃음) 제가 낸 의견 중 선출을 묻으려고 아침까지 삽질을 하다 소파에세 잠이 들잖아요. 그리고 미리가 와서 '경찰 왔어'라고 말할 때 제가 먼저 경찰에게 두 손을 내밀고 '서에 가서 말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관객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또 범모, 아라와 셋이 격하게 싸우잖아요. 그 때 총을 놓치고, 그 총이 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라고 말씀 드려서 그 장면이 대본과 조금 달라졌죠."
이병헌은 총구 앞에 선 불안 같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조차도, 자신이 살아오며 겪은 감정에서 출발해 조각한다. 삶과 연기가 긴밀히 맞물리는 셈이다.
"사실 배우는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들과 감정에서 도움을 만이 받아요. 그런 감정들을 상황에 맞게 극대화 시키거나 축소시키며 상상하며 연기하는 거라고 보시면 돼요. 누군가 나에게 총구를 겨눌 때의 불안은 사실 전 겪어본 적이 없긴 하지만, 재 삶에서 비슷한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찾는거죠. 이게 제 연기 방법이예요."
초반 캐릭터 구상 단계에서 그는 머리 모양과 수염까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분장이 자칫 과하게 느껴지면 인물보다 외양에 시선이 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의외의 해석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초반에 분장 테스트를 여러 번 했어요. 두 가지 레퍼런스가 있었는데 스티븐 맥퀸과 매즈 리켈슨 스타일이었어요. 두 사람의 스타일이 완전 달라요. 스티븐 맥퀸은 짧고 곱슬머리고, 매즈 리켈슨은 보통 생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이거든요. 그 중에서 스티븐 맥퀸 버전으로 결정이 났죠. 거기에 콧수염을 한번 붙여보자고 해서 붙여봤어요. 제가 볼 때는 남미 마약상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가 집중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베니스영화제 때 리뷰 중 만수가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 같다는 글을 봤죠. 실제로 획일화된 공장에서, 슬랩스틱 동작, 그리고 AI로 자동화된 시스템 안에서 적응 못하고 갈길을 잃은 표정에서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을 봤나봐요. 그래서 혹시나 감독님께 의도하신거냐고 여쭤봤는데 그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병헌은 ‘해고된 노동자’ 만수를 연기하면서 배우의 현실과 겹쳐지는 지점을 발견했다고 한다.
“노동자에게 해고가 아픔이라면, 배우에게는 기다림이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기약 없는 시간을 버텨야 하는지 모르는 하염없는 기다림이 쌓여가면 결국 실업이나 다름없죠. 최근에는 AI 문제가 더해져 동료들과 웃으면서도 씁쓸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일자리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는 걸 체감하거든요. 만수가 몸담았던 제지업도 종이 수요가 사라지면서 현실에서 설 자리를 잃었듯, 지금 극장 산업이 비슷한 위기를 겪는 것 같아요. 콘텐츠는 여전히 스트리밍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지만, 극장 자체는 관객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해답이 뚜렷하진 않지만, ‘좋은 극장에서 봐야만 비로소 빛나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가장 근본적인 데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해요."
이병헌은 오랜 시간 주연 배우로서 대중과 평단 모두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다. 정상의 자리를 지켜오면서도 매 작품마다 기대를 뛰어넘는 변신을 보여주었고, 올해 역시 그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게임', 애니메이션 더빙에 참여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 그리고 박찬욱 감독과 함께한 '어쩔수가없다'까지, 서로 다른 세 작품을 연이어 선보이며 다시 한 번 폭넓은 스펙트럼을 증명한 것이다. 관객은 그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기대하지만, 이병헌은 늘 그 이상의 결과물로 응답한다.
"저 스스로도 의아해요. 마치 제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흐름이 이끌어가는 듯한 기분입니다. 선택의 순간마다 '해보지 뭐’'하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이렇게 현상을 불러일으킬 줄은 저도 놀랍습니다. 물론 기분 좋은 게 훨씬 크지만, 동시에 불안도 있어요. 배우라는 건 결국 누군가가 잘하고 있을 때, 또 어떤 작품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화가 다 이뤘다'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다 잃었다'로 끝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요. 그래서 언제나 스스로 묻습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여전히 보고 싶어 하는 배우로 오래 남을 수 있을까. 그 불안감은 늘 제 안에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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