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재해보상법, 인과관계 입증이 관건
코로나 대응 공무원 자살 순직 인정 판례 있어
위험직무순직은 해당 안 돼
"순직 인정되면 정부 시스템 문제점 드러난 것"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난 8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대전센터를 찾아 숨진 행안부 공무원에 대해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자살 공무원 순직에 대한 범위를 두고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윤 장관의 이번 발언은 3일 사건 발생 후 엿세 만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다.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순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장관 입장에서 직원의 ‘순직’을 입에 올린 것은 상당히 무게감이 있다. 이번 윤 장관 발언을 두고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이유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법률적으로는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다만, 자살을 순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법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실제 인정 여부는 공무원재해보상심의위원회와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다.
자살도 순직 인정 가능…법적 근거는 있다
공무원재해보상법은 원칙적으로 ‘공무원의 자해행위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경우 공무상 재해로 보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동법 제4조 제2항 단서는 ‘공무수행이나 공무와 관련한 정신질환으로 자해행위를 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공무상 재해로 인정할 수 있도록 명시 해놨다. 이는 자살이라도 공무와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순직으로 볼 수 있다는 법적 근거가 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공무원이 자살로 사망한 경우 순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공무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거나 공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그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에 겹쳐서 질병이 유발 또는 악화되고, 그러한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정신적 억제력이 결여되거나 현저히 저하되어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서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추단할 수 있어야 한다.
법원은 자살자의 질병이나 후유증상 정도, 일반적 증상, 요양기간, 회복가능성 유무, 연령, 신체적·심리적 상황, 자살자를 둘러싼 주위상황, 자살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다.
구체적으로 코로나19 대응 업무를 담당하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악화돼 자살한 사건에서 서울행정법원은 2020년 순직을 인정했다.
법원은 업무량 폭증으로 휴일 없이 장시간 근무하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은 점, 기저 정신질환이 과중한 업무로 급격히 악화된 점, 사망 당일 3시간도 못 자고 다시 출근하던 중 투신한 점 등을 근거로 공무와 사망 사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인과관계 입증이 관건…판례는 엄격
이 같은 사례를 볼 때 윤 장관이 언급한 순직은 위험직무순직보다는 일반 순직에 가깝다. 위험직무순직은 ‘생명과 신체에 대한 고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무를 수행하다가 재해를 입고 그 재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 공무원’으로 정의된다.
이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위험순직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때문에 위험직무순직은 경찰, 소방, 국정원, 교도관 등 특정 직무에 한정된다.
일반 행정직 공무원은 원칙적으로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위험직무순직보다는 일반 순직 인정이 현실적인 경로로 보인다.
그러나 실무상 자살 순직 인정은 쉽지 않다. 공무원재해보상심의위원회와 공무원재해보상연금위원회는 그동안 공무와 사망 간 인과관계를 소극적으로 판단해 왔다.
초과근무 시간, 업무 분장표, 출입기록, 생산 문서 분량,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기록, 사망 직전 메시지와 유서 등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필요하다.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불승인 처분을 받게 된다. 실제로 많은 사례에서 유족이 1차 불승인 후 심사청구를 거쳐 행정소송까지 진행해야 비로소 순직을 인정받고 있다.
장관 의지만으론 부족…심의위·법원 판단 남아
국정자원 화재 사태로 국가 전산망 장애 업무를 총괄하던 행안부 디지털정부혁신실 소속 4급 서기관 A씨는 지난3일 오전 10시50분께 정부세종청사 중앙동에서 투신해 숨졌다.
A씨는 국정자원 대전센터가 만들어지는 초기부터 근무해왔으며 시설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과 애착을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윤 장관은 “해당 직원이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행안부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공무원재해보상심의위원회와 필요시 법원의 몫이다.
순직 인정은 유족급여 등 경제적 보상뿐 아니라 유족의 명예감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가 직접적 원인이 돼 정상적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렀다는 점을 객관적 증거로 입증해야 하는 만큼, 장관의 의지만으로 즉각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한 퇴직 공무원은 “자살한 공무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정부가 순직을 인정할 경우 현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라며 “더구나 장관이 순직 처리 발언을 하는 것은 상당히 신중해야 했다. 순직 발언을 공식적으로 밝힌 만큼 국가 배상도 불가피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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