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술주정을 꼬장이라고 부른다. 직장생활에서 회식을 하다가 술에 취해서 직장 상사에게 대들거나 무례한 짓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보통은 다음 날 회사에 와서 조용한 꾸지람과 놀림을 받곤 한다. 심한 말을 하거나 주먹질하면 시말서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술에 취해서 술주정을 하다 목이 날아간 사람이 있다. 하마터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같이 죽을 뻔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양정이다.
그는 한명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의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서기 1453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앞장서서 싸웠다. 가장 큰 걸림돌인 김종서를 제거할 때 아들 김승규를 죽였고, 철퇴에 맞고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린 김종서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가서 마지막 숨통을 끊어놨다. 성공한 쿠데타라 계유정난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양정은 정난 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455년에는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받아서 즉위할 때도 곁을 지켜서 좌익공신 2등에도 이름을 올렸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잔혹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와준 측근들에게는 대단히 착하게 굴어서 많은 재산과 권력을 주고 웬만한 사고를 쳐도 넘어가 줬다. 정통성이 없으니, 측근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그런 것 같다. 세조의 즉위 이후 양정은 오랫동안 평안도 절제사로 지낸다.
김종서 집 터 표지석 (출처 : 직접 촬영)
당시 조선은 북방의 여진족과 긴장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북방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킨 상황이었다. 쿠데타로 즉위한 세조는 자신에게 창끝을 겨눌지 모르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측근을 앉혔다. 양정은 거기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고, 그래서인지 정말 오랫동안 북방에서 머문다. 비슷한 케이스가 바로 김종서가 있다. 차이점이라면 김종서는 세종대왕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해서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는 것이고, 양정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불만이 쌓여있을 것 같은 양정은 오랜만에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조는 측근인 양정이 오랜만에 돌아오자 위로의 뜻으로 경복궁 사정전에서 잔치를 베풀어줬다. 그 자리에는 신숙주와 한명회 같은 측근들이 함께 했다.
술잔이 연거푸 돌고 있을 무렵, 갑자기 양정이 입을 열었다. 세조가 즉위한 지 12년째인 서기 1466년 6월 8일에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술자리였지만 사관이 함께 했는지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큐멘터리를 보는 수준으로 기록이 잘 남아있다.
양정(楊汀)이 앞에 나아 꿇어앉아 아뢰기를, "성상께서 어찌 과도하게 일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주는 만기를 모두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양정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임어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로지 한가하게 안일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이가 많으시니 그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얘기였다. 양정의 얘기를 들은 세조는 자신에게 왕위를 물러나라는 뜻인지 다시 한번 묻는다. 양정이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하자 세조는 ‘평소에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은 생각을 했다’는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한다. 아마 여기까지 했다면 그냥 유배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양정은 이번에도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러자 빡친 세조는 나는 임금의 자리 따위는 탐나지 않는 사람이라면서 승지에게 명해서 옥새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세자에게 양위를 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임금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는 얘기는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태종이 몸소 보여주었고, 신하들도 세조가 진심으로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진 가운데 신하들은 양위를 취소해달라고 목청을 높인다. 하지만 세조는 어서 옥새를 가져오라며 고집을 부린다. 즐거웠던 술자리는 갑작스럽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 와중에 여전히 술에 취한 건지 자기 기분에 취한 건지 알 수 없던 양정은 옥좌가 있는 어탑 아래에 서서 임금이 옥새를 가져오라는데 왜 가져오지 않는 것이냐며 여러 번 부르짖었다. 세자 역시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새벽에 되어서야 소동은 가라앉았다. 술기운이 가라앉은 세조가 내전으로 물러나자 한숨 돌린 한명회와 신숙주를 비롯한 측근들은 양정을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조는 다시 그들을 불러서 술을 주면서 양정이 나쁜 뜻으로 한 것은 아니니 처벌하지 않겠다는 성인군자 코스프레를 한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예를 들어 돈을 벌 욕심이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바로 자기는 돈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조카를 몰아내고 동생들까지 죽이면서 왕위를 차지한 세조가 자기 스스로 물러날 리 없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측근들이 세조의 욕심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양정은 임금에게 술주정을 하고 엿새만인 6월 12일에 목이 베이는 참수형을 당한다. 그나마 양정에게 다행인 건 자신만 처벌당했고, 자식과 친인척들은 연좌되어 처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앙정이 자신을 오랫동안 북방에 쳐 박아둔 세조를 원망해서 험한 말을 한 것 같다고 덧붙인다. 그런 불만이 술에 취하자 터져 나온 것이다. 술이든, 권력이든 그리고 다른 무엇이든 적당한 게 좋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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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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