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작 사라지고 해외 시리즈물만 남아…연말 극장가가 보여준 씁쓸한 현실[D:영화 뷰]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5.11.22 09:20  수정 2025.11.22 23:33

연말 극장가는 극명하게 갈라진 두 흐름이 공존한다. 한국영화는 중·저예산 독립 영화들이 중심인 된 상황에서, 스크린 전면에는 '위키드 : 포 굿', '나우 유 씨 미 3' 등 해외 시리즈물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 영화산업의 현재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현상이다.


ⓒ데일리안 전지원 기자

올해 연말 개봉작을 보면 한국 영화는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대신 제한된 공간을 활용해 심리와 정서를 쫓는 작품이 그 자리를 채웠다.


26일 개봉을 앞둔 영화 '넌센스'는 손해사정사 유나(오아연 분)와 수상한 웃음치료사 순규(박용우 분)의 조우를 통해 심리의 균열을 따라가는 심리 스릴러 작품이다. 19일 열린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제희 감독은 "'넌센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라며 "순규가 악인인지 아닌지, 유나가 끝까지 그를 믿어도 되는지 모든 게 흐릿해지는 이야기 구조 안에서 '믿음'이라는 감정의 불안정성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색깔을 이용해 섬세하게 설계됐다. 이 감독은 "유나는 '그린', 순규는 '마젠타'로 대조되는 색상으로 구성했다. 실제로 이 두 색은 보색이 되는 색인데 영화가 전개될수록 둘의 공간이 점점 서로의 색으로 물들어간다"고 설명했다. 빛과 어둠의 대비도 중요했다. 그는 "순규는 자신의 의지로 어둠 속에 숨을 줄 알고 유리할 때는 밖으로 나오는 능수능란한 인물이란 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빛과 어둠의 대비가 더욱 뚜렷해진다"고 영화의 관전 포인트를 전했다. 색과 빛을 기반으로 감정을 구축하는 방식은 저예산 심리스릴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 연출 방식이기도 하다.


지난달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역시 사건 자체보다 피해자의 복원 과정에 집중한다. 가족에 의한 성폭력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드러내는 대신, 주인공이 일상 속에서 흔들리고 회복되는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한다. 주인공 이주인(서수빈 분)이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일상의 순간마다 트라우마가 떠올라 괴로워하고, 동생 해인(이재희 분)이 가해자 삼촌이 감옥에서 용서해달라며 보내오는 편지를 감추는 장면 등을 통해 설명 없이도 피해자와 그 가족이 느끼는 내면의 복잡함을 담아낸다. 대규모 세트나 시각효과가 필요하지 않은 서사 구조는 지금의 독립영화 제작 환경에서도 비교적 지속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장르다.


이에 비해 같은 시기 개봉하는 해외 영화들은 대부분 대형 스튜디오가 제작한 속편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세계관과 시각적 스케일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들 작품은 모두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제작된 시리즈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에게는 세계 시장이 기본 전제이기 때문에 사건·스케일 중심 서사가 주를 이룬다.


19일 한국에서 세계 최초 개봉한 '위키드: 포 굿'은 뮤지컬과의 높은 싱크로율로 인기를 끈 전작 '위키드'의 스케일을 확장했다. 사악한 마녀 엘파바(신시아 에리보 분)와 착한 마녀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 분)가 엇갈린 운명 속에서 진정한 우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대형 퍼포먼스로 풀어낸다. 화려한 캐스팅과 대규모 넘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어 11월 26일에는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수상작 '주토피아'의 속편 '주토피아 2'가 9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다. 주디(지니퍼 굿윈 분)와 닉(제이슨 베이트 분)이 도시를 뒤흔든 정체불명의 뱀 게리(키 호이 콴 분)를 추적하며 새로운 세계로 뛰어드는 수사 어드벤처로,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를 넓혀 전편보다 업그레이드 된 비주얼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편견을 넘는 연대와 우정을 담아내지만 확장된 공간과 스케일, 추적의 긴장감에 더욱 무게를 실었다.


지난 12일 개봉해 개봉 첫 주말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나우 유 씨 미 3'는 빌런들과 싸우는 마술사기단 '포 호스맨'이 새로운 미션인 하트 다이아몬드를 훔치기 위해 도시를 누비며 지상 최고의 마술쇼를 펼치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뉴욕·아부다비·프랑스·헝가리 등 전세계를 무대로 한 다양한 로케이션 촬영과 대규모 트릭 하우스, 신예 마술사들까지 뭉쳐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올해 연말 극장가가 유독 극명하게 갈린 흐름을 보이는 데에는 구조적·환경적 변화가 맞물린 결과가 있다. 코로나 이후 투자 회복 속도가 더딘 국내 시장에서는 제작비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경향이 강화됐고 그 공백을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해외 시리즈물이 자연스럽게 메우는 흐름이 굳어졌다. 한국 영화는 제작·투자·배급 전반에서 대형 프로젝트가 사라지면서 감정·인물 중심의 중·저예산 서사로 쏠리고 반대로 해외 스튜디오들은 이미 구축된 세계관과 대규모 자본을 바탕으로 시각적 스케일을 전면에 내세우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상황이 뚜렷해졌다. 산업 구조와 자본 규모의 차이가 두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갈라놓고 있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미국은 독점방지법에 따라 영화 배급과 상영을 분리하지만 한국은 CJ 등 대기업이 제작부터 투자, 배급, 상영까지 모두 장악한 수직계열화 구조"라며 "자사에서 배급한 영화는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스크린에 걸릴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환경에선 대작을 만들기 위한 100억원 이상 규모의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결국 거대한 사건이나 사회 구조를 다루는 한국 영화는 점점 줄어들고 결국 감정과 인물 중심의 소규모 서사만 살아남는 구조가 됐다"고 진단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할리우드는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하는 만큼 사건 중심의 시리즈 블록버스터가 훨씬 유리하다"며 "그에 비해 한국은 현재 투자가 위축되며 제작비 조달 자체가 어렵고 내수 중심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물의 감정과 정서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감정 중심 서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외의 선택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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