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무역·탄소규제에 수출 환경 급속히 악화
내수 회복 지연 속 생산·수출 지표 동반 둔화
‘K-스틸법’ 제도 정비...업계는 전략 변화 가속
주요 수출국의 보호무역과 탄소 규제가 강화되며 새해 철강업황의 어려움이 지속될 전망이다.ⓒ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병오년 ‘붉은 말의 해’를 맞은 철강산업이 다시 한 번 방향 전환의 기로에 섰다. 내수 회복이 제한적인 가운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보호무역과 탄소 규제가 강화되며 기존의 물량 중심 성장 전략은 한계에 직면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2026년이 체질 개선과 산업 재편의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막힌 수출길…보호무역·탄소 규제 이중 압박
2026년 철강업황을 둘러싼 대외 환경은 녹록지 않다. 주요 수출 시장을 중심으로 보호무역 기조가 강화되고 있어서다. 미국은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쿼터제를 전면 폐지하고 한국산 철강 전량에 50%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세이프가드 쿼터를 대폭 축소하는 동시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올해부터 본격 적용하며 수입 철강에 대한 진입 장벽을 높였다.
EU는 2024년 기준 국내 철강 수출 물량의 13.4%를 차지하는 최대 수출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CBAM 시행으로 국내 철강업계가 향후 10년간 약 3조원 이상의 탄소 인증서 비용을 부담할 것으로 추산했다. 캐나다는 지난해 연말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 대한 철강 저율관세할당(TRQ) 기준을 75%로 낮췄고 베트남과 인도 등 신흥국들도 반덤핑·세이프가드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보호무역 확산에 따라 철강은 한국 수출 증가 흐름에서도 예외로 남았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수출액은 반도체·자동차·선박 호조에 힘입어 역대 최대를 기록했으나 철강 수출은 감소세를 이어갔다. 작년 연간 철강 수출액은 303억 달러로 전년 대비 9.0% 줄었다.
새해 전망도 보수적…내수·수출 동반 부담
철강산업의 수급 전망ⓒ한국산업연구원(KIET)
대외 여건 약화는 생산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세계철강협회(WSA)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국내 조강 생산량은 5610만톤(t)으로 전년 대비 3.7% 감소했다. 업계에서는 연말 감산 기조가 이어지며 작년 연간 조강 생산이 6100만톤 안팎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2010년(5891만5000톤) 이래 15년 만의 최저 수준이다.
글로벌 시장 역시 침체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4년 세계 총 조강 생산량은 18억8260만톤으로 전년 대비 0.8% 감소했다. 같은 기간 국내 연간 조강 생산량은 6350만톤으로 4.7% 줄며 글로벌 평균보다 감소 폭이 컸다.
문제는 새해 전망도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산업연구원(KIET)은 올해 철강 수출 물량이 전년 대비 6.4% 감소한 2682만톤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수출 금액도 5.0%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내수 역시 뚜렷한 회복 동력이 없어 전년과 유사한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철강 생산량은 6253만톤으로 전년보다 2.0%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중국 변수도 부담 요인이다. 중국은 내수 부진 속에서 과잉 생산된 철강을 저가로 수출하며 글로벌 가격을 압박해 왔다. 세계철강협회는 올해 글로벌 철강 수요가 전년 대비 1.3%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중국 수요는 1%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정부가 감산과 구조조정을 언급하고 있으나 단기간 내 공급 과잉이 해소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백재승 삼성증권 연구원은 “중국 정부가 얼마나 강한 의지를 토대로 구조조정을 단행할지가 올해도 관전 포인트”라며 “부동산 시황 부진이 길어지고 있어 구조조정 강도가 강하진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실행력이 갖춰진다면 철강 시황이 지금보다는 개선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의 시각도 보수적이다. 한국신용평가·나이스신용평가·한국기업평가는 공통적으로 2026년 철강산업 전망을 ‘부정적’으로 분류했다. 건설 경기 침체 장기화와 중국발 저가 철강 유입, 보호무역 고착화를 주요 리스크로 지목했다. 특히 건설용 강재와 강관 비중이 높은 업체일수록 실적 하방 압력이 클 것으로 봤다.
송동환 나이스신용평가 책임연구원은 “국내 철강 수요의 약 40%를 차지하는 건설산업의 장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며 “수요와 공급 측면 모두 부담 요인이 작용해 단기적으로 비우호적인 사업 환경이 지속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제도 정비·전략 전환…산업 재편 시험대
현대제철 미국 루이지애나 전기로 제철소 모형 사진.ⓒ현대제철
이런 가운데 철강산업을 둘러싼 제도적 환경은 일부 정비됐다. 국회는 지난해 11월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K-스틸법)을 통과시켰다. 감산 협의와 설비 조정을 공정거래법상 담합 예외로 인정하면서 업계 차원의 질서 있는 공급 조정과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저탄소 제품의 공공 조달 확대 조항도 포함됐다.
권지우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철강산업의 방향을 양적 성장에서 고부가·저탄소로 전환하겠다고 공식화한 점은 긍정적”이라며 “다만 전기요금과 원료비 부담이 큰 상황에서 직접적인 생산비 절감 대책이 빠져있다는 점은 아쉽다”고 짚었다.
업계 전략 역시 분명해지고 있다. 국내 주요 철강사들은 고부가 제품 비중 확대와 저탄소 공정 투자를 중장기 전략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전기로 확대와 수소환원제철 연구개발, 해외 생산 거점 확보가 대표적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전기로 일관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며 관세와 탄소 규제에 동시에 대응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재윤 산업연구원 실장은 “현재 철강산업의 위기는 단순한 경기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며 “저탄소 소재 기술 개발과 설비 투자 촉진 등을 통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탄소규제 강화에 대한 대응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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