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 전 3월 18일 독일 민족은 분단을 끝냈다. 평화 혁명이었다.
원동력은 동독 주민. 자유·민주주의·인권·복지를 40년이나 강탈당한 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일어섰다. 죽음을 무릅썼다.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외침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고, 멈추지 않았다.
사실 3월 18일은 비극의 날이다. 피의 베를린이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 몰아친 혁명의 물결 속에 독일에서도 전제 군주에 맞서 민주적 대의제도, 헌법 제정, 분열된 민족의 통일을 요구하며 시민들이 거리에 나섰다. 이날 베를린에는 수만 명이 시위했다. 국왕 빌헬름 4세의 약속과 달리 군이 발포했고, 하룻밤 사이 약 270명의 시민이 죽었다.
1990년 3월 혁명은 유혈 없이 진행돼야 했다.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일으켜 전 인류에게 크나큰 비극을 안긴 독일이다. 다시는 그 짓을 못 하도록 찢었는데, 다시 하나가 되려는 독일을 어느 국가, 어느 국민이 환영했겠는가.
자유·민주주의·개혁·개방을 외치며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던, 11월 13일 라이프치히 ‘월요일 시위’에서 처음으로 통일을 요구하며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 함성을 울렸던 동독 시민 앞을 또 다른 장벽 세 개가 가로막았다.
첫째, 동독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의 퇴진(10월 17일) 이후 새 총리가 된 한스 모드로와 정부는 당연히 통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개혁 실시, 서독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한 동독의 생존이었다.
둘째,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역시 통일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독일을 국제법적으로 동서로 갈라놓았던 전승 4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 특히 소련이 동독을 놓아줄 리 없다고 생각했고, 대다수 동독 주민이 통일을 원할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콜은 모드로와 대규모 경제 지원, 동서독 간 각종 조약 체결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이른바 ‘조약공동체(Vertragsgemeinschaft)’를 만들고자 합의했다. 11월 28일 이를 담은 <양 독 관계의 새로운 설정과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한 10개 항 계획>을 발표했다.
신속한 통일이 아니라 동독 주민에게 긴급 구호를 하고, 동독 체제의 변화를 지원하며, 동독과 국가연합을 구성한 후 통일은 유럽 통합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한다는 구상이었다.
콜은 수년 후 이 공표는 독일의 분단과 분단 극복에 법적 권리를 가졌던 전승 4국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며, 이것이 오히려 동독 주민의 통일 열기에 불을 붙일 것으로 염두에 두었다고 회고록에 담았다. 실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동독 주민의 심장에 불을 놓은 것은 사실이었다.
셋째, 1989년 개혁·개방을 위한 변혁의 선두에 섰던 지식인 시민운동가들의 다수가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드러났다. 이들은 통일이 아니라 동독 내부 개혁에 초점을 두었다. 성명서 발표로 행동에 나섰다.
디터 클라인, 귄터 크루셰, 콘라트 바이스가 초안을 만들고 11월 26일 작가 크리스타 볼프가 다듬어 31명이 서명한 호소문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Für unser Land)’를 11월 28일 콜이 10개 항을 발표한 바로 그날 저명한 작가 슈테판 하임이 국내외 기자를 초청한 기자회견(75명 참석)에서 낭독했다.
서독과의 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약공동체도 거부하고, 사회주의 동독의 국가적 독립성, 동서독 공존을 요구했다. 평화, 사회 정의, 개인의 자유, 이동의 자유, 환경 보호와 같은 가치를 언급하면서, 통일할 경우 동독의 도덕적, 물질적 가치가 팔려나가고, 서독이 동독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장악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는 여전히 유럽 국가들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통해 서독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발전시킬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때 영감을 얻었던 반파시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이상(理想)을 다시 가다듬을 수 있습니다.”
2주 만에 20만 명이 서명했다. 여기에는 호네커 후계자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에곤 크렌츠는 물론이고, 1990년 3월 18일 선거로 동독 마지막 총리가 돼 서독과 통일을 협상했던 로타 드 메이지에르도 합류했다. 다수의 문화 및 지식 인사들이 동조했고, 찬성이 늘어갔다.(1990년 1월 호소 캠페인 종료 당시 서명 117만명)
서독 쪽에서도 12월 2일 ‘지원’ 성명이 있었다.
“당신의 조국을 위하여,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Für euer Land, für unser Land)”라는 구호를 내세워 관계 개선은 좋지만, 당신들은 사회주의가 좋다니 그 길로 가고 우리는 우리 길을 간다는, 통일 반대의 메시지를 전했다.
동독 주민은 분노했다. 시위대 선두에 섰던 이들의 ‘배신’, 여전한 공산당 정부, 서독의 미온적 태도가 가슴에 불길을 타오르게 했다.
12월 초부터 통일 요구가 전 동독에 메아리쳤다.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거센 함성을 울렸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 “사회주의는 결단코 반대(Nie wieder Sozialismus)”
동독 주민의 통일 의지를 확인한 콜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로 기록될 통일 정치에 발동을 걸었다.
콜은 1989년 12월 19일 동독 제2의 도시 드레스덴으로 달려갔다. 열광하는 동독 주민 앞에서 마침내 통일 추진을 선언했다.
“역사의 순간이 허락한다면, 나의 목표는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데 있습니다.”
패전국으로, 전쟁 범죄에 대한 문책으로 분단된 독일이다. 그 독일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 서독이지만, 통일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럴 권리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통일에 다가가는 방식이었다.
전승 4국은 물론이고, 독일로 인해 참극을 겪어야 했던 주변국, 통일을 반대하는 동독 주민은 물론이고 서독 주민도 설득할 수 있는, 통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방안이 마련돼야 했다.
누구도, 어느 국가도 독일 통일을 반대하지 못할 결정적 계기는 동독 주민의 총선거를 통한 ‘민족자결권 행사’였다. 전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동독 주민이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비밀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전 세계에 보여줘야 했다.
각 정당·단체의 선거 벽보 ⓒUlrich Häßler, Bernd Settnik
1945년 분단 이후 소련 점령 기간이었던 1946년 전 베를린 시의회 선거에서 자유선거가 한 번 실시됐다. 당시 동독 공산당은 참패했다. 1949년 동독 출범 후 자유선거는 사라졌다.
콜은 동독 주민의 자발적 결단에 의한 통일 의지 표출만이 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전략을 수립했다. 동독의 제10대, 마지막 ‘총선(Volkskammerwahl)’이 그 무대였다.
먼저 콜은 모드로를 만나 통일로 가야만 함을, 주민 투표가 필요함을 설득했다. 동독의 주요 개혁 세력, 통일 지지 세력과 물밑 접촉도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 정국은 그야말로 혼란이었다. 무수한 정당이 들어서고, 정치 세력이 이합집산했다.
총선 승리를 위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콜이 속한 보수정당인 기독교민주당(CDU)은 분단 이전에는 한 정당이었으나, 동독이 출범하고 동쪽에서는 동독 공산당에 충실한 위성 정당으로 변질했다. 콜은 동독 CDU를 공산당과 절연케 하고, 서독 CDU의 자매정당으로 재정비하면서 드 메이지에르가 이끌도록 했다.
그리고 자유, 복지는 물론 신속한 통일에 공감하는 제 정당·세력과 연대해 ‘독일을 위한 동맹(Allianz für Deutschland)’을 만들어 선거에 임했다. 독일 통일을 최대한 빨리 달성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다.
1949년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 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를 바탕으로 우선 서독만의 정부 수립을 이끌었던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의 CDU 노선을 반대하며, 전 독일의 통일을 주장했던 진보당 사회민주당(SPD), 이번에는 신속한 통일을 반대했다.
1946년 동독 공산당에 통합돼 사라졌다가 변혁기인 1989년 10월 7일 재건됐던 동독 SPD와 서독 SPD는 역시 자매정당으로 협력하며,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했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의 마지막 총선, 정당·세력들의 연대에도 불구하고 19개 정당과 5개 정치연합, 모두 24개 단체가 선거 용지에 이름을 올리고 동독 주민의 선택을 기다렸다.
투표하는 동독 주민, 기표소에 전에 없던 칸막이가 쳐졌다. ⓒ Ulrich Häßler, Bernd Settnik
동독 시민들은 위대했다. 유권자 1240만여 명 가운데 93.4%가 투표(유효표 1154만927명)한 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동맹’이 48%로 압승했다. SPD는 22%, 동독 공산당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은 16%였다.
기본적으로 통일에는 동의한 SPD를 포함하면 동독 주민 80% 이상이 독일 통일에 찬성했다.
폭압적 공산당 독재체제를 40년 동안 체험했던 동독 주민이 자신의 체제를 버리고 서독과의 신속한 통일을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선택한 마당에 어떤 국가, 국민도 통일을 반대할 명분을 잃었다.
3월 18일, ‘독일민족통일날’이다. 이제 법적 통일로 다가가야 했다.
‘독일을 위한 동맹’, SPD 등과 연립 정부를 구성한 동독 CDU의 드 메이지에르는 1990년 4월 12일 새로 구성된 인민의회에서 마지막 총리로 선출됐다. 최우선 과제는 명확했다. 신속한 통일 추진이었다.
독일 내적으로는 서독과 협상을 시작했고, 통일의 외부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서독과 함께 전승 4국과 이른바 ‘2+4 협상’에 참여했다. 서독이 진두지휘한 사실상 ‘1+4 협상’이었다.
통일은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통일 이후 독일의 영토, 군사 동맹체제, 병력과 무기에 관한 논의였다. 10월 3일 독일의 법적 통일이 완성됐다. ‘독일통일날’이다.
1990년 3월 18일은 독일 민족의, 독일 정치의 위대한 승리의 날이다. 그 중심에는 자유·민주주의·인권·복지로 향한, 사회주의는 결코 다시는 안 된다는 동독 주민의 뜨거운 심장과 열정과 의지가 있었다.
통일 이후 독일 주민, 특히 동쪽 주민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디라도 가서 자신의 의견을, 불만을 표출하는 자유를 누린다. 통일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함성을 지르지는 않는다.
독일 통일을 ‘흡수통일’이라고 ‘함부로’ 왜곡·재단해서는 안 된다.
독일 통일이 흡수통일이기에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은 아니라는 주장은 ‘무식의 소치’에 다름 아니다.
김정은이 2개 국가에 이어 우리와 다른 민족이라 주장하는 주된 이유가 북한 주민으로부터 민족자결권 행사를 박탈하기 위해서다. 우리와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에게 민족자결권 행사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반도 모든 주민이 하나의 민족이고, 하나의 국가가 돼야 한다’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독일의 ‘평화적 합의 통일’,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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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기웅 한국평화협력연구원장·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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