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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좌파 '외눈박이 역사' 써내려 가다


입력 2013.11.13 23:51 수정 2013.11.14 00:23        이충재 기자

<교과서 논란 어디로 가나 ②>"사회변혁 역사를 이용하라"

70년대 대학생 운동권 교재, 역사교과서 '길라잡이' 역할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 국민네트워크 한 회원이 지난 9월 12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무효화 촉구기자회견을 마친 뒤 퍼포먼스용으로 제작된 한국사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다.ⓒ연합뉴스
“역사를 사실에 입각한 학문이 아닌 사회변혁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 전쟁’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변혁을 겪은 굴곡진 역사의 배경이 펼쳐진다. 특히 1980년대 민주화 물결이 만들어낸 사회적 파장은 역사학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군사정권에 맞선 반작용으로 역사학계의 방향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외눈박이 사학’의 역사가 시작된 근원이었다.

1970년대 대학생 손에 들린 운동권 교재, 역사교과서 '길라잡이' 역할

무엇보다 1970년대에 대학생들의 손에 들렸던 책은 현재의 역사교과서의 방향을 잡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우파 역사학자들은 지적했다.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서 ‘한국사교과서 어떻게 편향되었나’에서 “이들이 대학생이던 시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해방전후사의 인식’등 민족-민중주의 사관에 입각해 쓰인 현대사 책들이 널리 읽혔다”고 했고,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는 “386세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안 하고 데모만 하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운동권에서 좌파서적 등으로 배운 것만 가지고 현재의 모습이 됐다”고 했다.

이 같은 사상의 좌표는 정치-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고, 현재까지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사학계의 경우 그 영향력이 더욱 강력했고, 변혁의 물살을 타고 한쪽으로 흘렀다. “역사를 사실에 입각한 학문이 아닌 계급투쟁에 입각한 사회변혁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대학교 내 학생동아리 등을 통해 이러한 서적을 탐독하는 이른바 의식화 과정을 거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된 젊은이들은 한국 근현대사에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직접 한국사 연구에 뛰어들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화와 개혁 움직임의 확산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진보적인 연구자 집단이 현실변혁과 민족민주운동에 관심을 갖고 사학계로 발길을 옮긴 것. 이른바 ‘민중사학’이 역사학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민중사학을 이끈 인물은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정창렬 전 한양대 명예교수,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등이었다.

정 위원은 이를 두고 “식민주의 지배의 긴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맞이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경험은 민족문제에 대한 감수성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 결과 한국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과 접목되어 민중사학의 형태로 나타났다”며 “민중사학은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유입되면서 대두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역사교사 모임, 전교조와 함께 '대중용 교과서' 펴내

민주화의 흐름과 함께 민중사학자들의 관심은 국사교과서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우선 국가 교과서의 국정제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하며 ‘국정제 폐지’를 이슈화했다. 1988년 창립된 역사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이 선봉에 섰다. 다음 수순은 국정제 교과서를 대체할 ‘자체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초반엔 교육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문교부는 국정 국사교과서의 검인정화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면서 이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당시 문교부 국사담당 윤종영 편수관은 “요 사이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학자들은 극히 편향적인 계급사관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며 “이러한 입장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이것이 중등학교의 교재가 된다면, 앞으로 우리 역사교육에 많은 문제를 가져올 염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화의 흐름을 탄 강단세력은 결국 역사교과서를 펴냈다. ‘역사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은 대중용 역사교과서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살아 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내놨다. 이 교과서는 역사교육을 위한 교사모임이 연대 단체인 전교조와 함께 제작했다.

이어 1990년 구로역사연구소에서도 중고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중용 교과서 ‘바로보는 우리 역사 1,2’를 발간했다.

정 위원은 “민중사학자들은 국가 교과서의 내용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국사 교과서가 사회 구성원의 정치사회적 이념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당시 역사 단체에서 관련 책을 내놓은 것은 국정 교과서를 대체할 대중용 교과서를 펴내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사학계의 좌편향은 더욱 심해졌다”고 말했다.

'역사 쏠림현상'에 견제구 날아들어 "마르크스사관 입각한 편향된 인식"

1990년대에 들어서 민중사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역사학계 안팎에선 “민중사관이 마르크스 사관에 입각한 편향된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본격화됐다.

사학계의 쏠림현상은 결국 논란으로 폭발했다. 이른바 ‘준거안 파동’이다. 발단은 1994년 3월 교육부가 제6차 교육과정 국가교과서의 개정을 위해 마련한 ‘국사교육 내용 전개의 준거안’ 연구보고서 시안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가 중심이 돼 내놓은 현대사 시안 내용 가운데 ‘10월 항쟁’과 ‘제주4.3항쟁’으로 용어를 바꾸어 기술하자는 부분이 논란의 핵심이었다.

시안 내용은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기술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반민법 제정, 농지개혁 등 건국 초기의 활동과 제주 4.3항쟁, 여순사건 등을 이해하게 한다”였다.

특히 서 교수를 중심으로 ‘6.25전쟁’을 ‘한국전쟁’이란 용어로 바꾸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6.25의 역사적 배경과 향후 국민적 인식을 염두에 둔 용어였다.

“전쟁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전쟁의 명칭은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6.25전쟁이라는 용어에는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이 중시되고 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상기하자 6.25 등의 표현으로 북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키웠다. 그런데 이 용어는 6월 25일 이전부터 있었던 38선 근방에서의 부분적인 전투와 지리산 등에서의 빨치산 활동을 잊기 쉽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국제전으로서의 성격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는 6월 25일 북이 침공했다는 중요한 사실이 잘 부각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전쟁의 국제전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서중석 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중에서)

정 위원은 서 교수의 ‘6.25 서술’에 대해 “전쟁의 원인과 관련해 내전설의 입장을 취하고, 전쟁 전 38도선에서의 분쟁을 강조한다”며 “이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두 정부가 들어서서 물리적 충돌을 거듭하다가 결국 전면적인 전쟁으로 번졌다고 주장하려는 것으로 전쟁이 남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희석시키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이에 언론은 사학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현대사 서술 부분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우파학자들은 “해당 용어는 민중사관에 바탕을 둔 것”이라며 “재야세력의 역사 재조명 작업의 하나로 나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가 정통성을 부인하고, 북한 주장에 동조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비판 여론이 이어지자 교육부는 ‘서중석 교수의 사견’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준거안 파동은 교육부가 종래 견해를 대폭 수용하는 최종 준거안을 2004년 11월 마련하면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최종 준거안에도 논란된 ‘대구항쟁’, ‘12.12쿠데타’가 아예 제외되고, ‘4.3항쟁’이 원래 제5차 교과서의 용어인 ‘제주도4.3사건’으로 돌아갔다. 지적된 ‘한국전쟁’ 대신 ‘6.25전쟁’으로 쓰였다.<계속>

이충재 기자 (cjle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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