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만으로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오묘한 스포츠인 축구 앞에서 이른바 ‘FIFA랭킹'은 허상에 가깝다.
자칭 ‘아시아 맹주’ 일본이 대표적 예다. 일본(랭킹 42위)은 툭하면 ‘아시아 대표로 나가서 싸우겠다’고 떠벌린다. 2011년 월드컵 2차 예선에서 당시 ‘17위’ 일본은 ‘124위’ 북한에 완패했다. 월드컵 예선 탈락이 확정된 북한은 세대교체를 위해 23세 이하 선수들로 일본전에 나섰다. 반면, 일본은 가가와 신지와 엔도 등 자타공인 1군이 출격했지만, 북한 축구의 투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처럼 FIFA 랭킹의 결정적 모순은 ‘상대적인 관계’가 배제됐다는 점이다. 1위 스페인도 11위 브라질만 만나면 작아진다. 상대전적 2승2무5패로 열세다. 올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브라질에 0-3 대패했다.
상대전적 40승22무14패 한일전(한국 우세)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에 2연승한 일본 축구계는 섣불리 “‘아기 호랑이’ 한국을 잠재웠다. 일본이 아시아 캡틴”이라고 호들갑 떨었다. 그러나 정작 2000년대 이후 한일전은 4승 6무 4패로 동등하다.
그리고 ‘내일의 국가대표’ 20세 이하 청소년대표는 27승 8무 5패로 한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수년 째 한국보다 최소 10계단 이상 FIFA 순위가 높다. ‘강팀과의 A매치 원정 평가전’을 자주 치렀기 때문이다. 원정 경기는 ‘가산점’을 부여한다.
문제는 일본의 강팀 원정 평가전 몇 게임이 ‘꼼수’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지난 16일 FIFA 랭킹 8위 네덜란드전이 대표적 예다. 혼다 케이스케의 동점골로 2-2 무승부라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러나 내면을 파헤치면 무승부도 일본 입장에선 창피한 결과다.
일본-네덜란드전은 사실상 일본 홈경기였다. 네덜란드와 역사적으로 앙숙관계(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인 벨기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관중도 5:3:2 비율로 벨기에 거주 일본 교민, 벨기에 축구팬, 네덜란드 응원단으로 구성됐다. 전반 네덜란드가 선제골을 넣었을 땐 분위기가 싸늘할 정도였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2.5군’이었다. 네덜란드리그에서 뛰는 평균 24세 이하 핏덩이 신인 주축에 아르연 로벤, 반더바르트 2명만 더했을 뿐이다. 반 페르시, 스나이더, 카윗 등 네덜란드 간판스타는 대거 불참했다. 이 때문일까. 솔직한 가가와 신지는 “이겼어야 하는 경기”라고 아쉬워했다.
A매치 통계만으로 FIFA 랭킹을 산정하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은 한국-스위스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스위스는 11월 기준, 7위에 올라있다. 2014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무패’로 본선에 진출한 성과가 크다. 또 지난 2010 월드컵에서 우승팀 스페인에 유일한 1패를 안겼고, 최근 평가전에선 브라질마저 1-0으로 잠재웠다.
그러나 월드컵 톱시드까지 거머쥔 스위스도 한국에 물렸다. FIFA 랭킹 56위 한국은 지난 15일 스위스와의 평가전서 2-1 역전승했다. 한국은 전반 카사미에게 실점했지만, 후반 홍정호와 이청용의 헤딩골이 터지며 말리전(3-1)에 이어 홈에서 2연속 역전승을 거뒀다. 스위스의 A매치 무패 행진(10승4무)에 제동을 건 한국은 FIFA 랭킹 19위 러시아전(19일 오후 11시)을 앞두고 있다.
스위스전 승리는 결코 ‘다윗의 반란’이 아니다. 이길 팀이 이겼다. 축구는 ‘상대적 관계’가 큰 영향을 끼친다. 스위스는 이탈리아나 크로아티아처럼 예리한 칼날을 지니지 못했다. 스위스의 최대 장점은 공격이 아닌 철통 방어다. 선 수비 후 공격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팀이다. 스페인, 브라질도 그렇게 잡았다.
그랬던 스위스가 한국을 상대론 ‘낯선 공격축구’를 구사했고, 한국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했다. 한국은 물오른 K리거와 유럽파 태극전사의 경험이 조화를 이루며 빠른 역습과 다채로운 공격을 펼쳤다. 하루전날 입국한 스위스의 시차 부적응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이날 선발 출장한 한국 주축 역시 시차가 덜 풀린 유럽파였다. 7위 스위스를 잡은 56위 한국의 결과가 말해주듯, FIFA 랭킹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다. 그저 전체적인 큰 그림을 엿보는 참고자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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