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14>인간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그린 찬란한 벽화 예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굽은 나무 등걸에 이렇게 매달려
내 피곤한 몸을 흔든다.
새가 불러 그의 손님이 되어
나는 그의 둥우리 안에서 휴식한다. 여기는 어디인가.
아, 아득히 먼 곳!
하얀 바다는 잠들어 누웠다.
그 바다 위 진홍빛 돛배가 떠 있다.
바위, 무화과나무, 종탑과 항구,
목가(牧歌) 들리는 곳에 양떼의 울음,
남국의 무구(無垢)여, 나를 맞아 다오!
착실하기만 하다면―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언제나 돌다리를 두드리고 걷는, 그것은 딱딱하고 편하지 않다.
바람에게 말했지, 나를 치켜 올려 달라고.
나는 새들과 어울러 나는 것을 배웠지―
남녘을 향해, 바다를 건너 나는 비상하였다.
니체의 '남국에서'라는 시다. 니체가 비상을 꿈꾸던 남국은 어디였을까? 그가 휴양하며 머물던 알프스의 아름다운 계곡 마을 실스 마리아(Sils Maria)였을까? 찬란한 문명과 비극을 탄생시킨 그리스의 어딘가를 의미했을까? 한용운 시인에게 ‘님’이 절대적 진리와 가치의 희구였듯이, 니체는 자신의 방황하는 영혼을 정화하고, 탐욕과 무지로 찌든 세상을 깨우칠 절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이상향을 그린 것이 아닐까.
그리스는 나의 ‘남녘’이다
나에게 남국은 고대 그리스 세계다. 나의 그리스 문화유산 답사를 위한 배낭여행은 바로 인류 문명의 원천, 즉 고대 인류 문화와 사유방식의 뿌리를 확인하는 과거로의 여행이다. 하지만 퇴행이 아닌 또 다른 비상이다. 인류 과학 문명은 첨단으로 치닫고 있지만, 우리의 정신세계는 갈수록 메말라간다. 무지를 깨칠 지혜의 갈증으로 고독한 영혼들은 타들어가고 있다. 정신을 씻겨줄 해맑은 샘물이 절실하다.
고대 그리스인의 창조적 예술정신, 지혜를 갈급하던 철학정신, 쉼 없이 거친 바다와 척박한 땅을 개척하던 그들의 도전 정신과 족적이 남긴 문화유산 속에 분명 우리를 ‘치켜 올려’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스 문명은 인간과 신이 똑같이 어울릴 수 있었던 자유가 충만한 세계였다.
우리가 되살려야 할 인문정신의 진수가 고대 그리스 문명에 있다. 중국의 고대에는 하늘의 아들을 자처한 절대자만 있었을 뿐, 자유를 누리는 인간 자체에 눈길은 쏟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 제가백가 모두 군주에게 복무하며 조언하고 싶어 안달하던 정치가이자 경세가였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펼칠 권력을 얻기 위해 천하를 주유했다. 중국 고대에 인간의 존재와 가치, 우주와 자연의 이치 그 자체를 궁구한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ia)’ 진정한 철학자와 인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예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던 이유다.
나는 인간의 이야기를 캐고 싶다. 신을 숭배하되 신에 억압되지 않고 자유 영혼을 누렸던 인간의 시대를 복기하고 싶다. 신과 어우러지던 인간의 사유를 캐고 싶다. 신화와 전설, 문학 작품과 대리석 기둥에 담긴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리스 문명을 답사해야만 하는 이유다.
또 크레타 섬을 그토록 찾고 싶었고, 내 가슴이 더욱 설레던 까닭도 그리스 문명의 원천을 직접 느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스는 나의 ‘남녘’이요, 크레타는 나의 ‘남국’이다. 크노소스 궁전은 그 남국의 비밀을 간직한 요람이다.
부겐베리아 꽃이 만발한 남국의 겨울
관광 비수기인 1월 말의 크로노스 궁전은 한산했다. 해풍에 이리 저리 기운 키 큰 소나무의 군락이 유적의 세월을 말해준다. 크노소스 궁전으로 들어가는 터널식 꽃길이 아름다운 연분홍 화관을 쓴 것 같다. 부겐베리아(Bougainvillea)의 아름다움이 남국의 겨울을 잊게 한다. 마치 화려했던 크레타 문명의 진수로 입장하는 상징을 보여주는 듯하다.
저 꽃길 뒤엔 4천여 년 전의 인간의 자취들이 라비린토스(Labyrinthos: 미궁(迷宮))로 불린 크노소스 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한참이나 서서 입구의 풍광을 바라보았다. 수천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때의 갑작스런 진공의 압박이라도 느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크게 쉬었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당시 크노소스의 서쪽 문이 있던 방향에 있다. 모든 건물은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받기 위해 동향으로 서 있을 것이다.
크노소스를 발굴한 위대한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크노소스 궁에 들어서면 넓은 서쪽 광장을 먼저 보게 된다. 관람 코스를 따라 보호 말뚝과 줄을 쳐서 관광객이 아무 곳이나 마구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는 흉상이 있다. 영국인 아서 에번스 경(Sir Arthur John Evans, 1851-1941)이다. 그는 독일인 슐레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데 자극받아 크레타 문명 발굴과 복원에 평생을 매진한 고고학자다.
그의 열정과 헌신이 아니었더라면 크노소스는 영원히 신화 속의 이야기로 묻혀버렸을 뻔 했다. 실제로 19세기까지 크레타 문명의 당연히 신화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에번스는 옥스퍼드 대학교와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의 애슈몰린 박물관에서 1884년부터 1908년까지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고고학 연구에 매진했다.
에번스가 크레타 문명에 호기심을 갖고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발굴에 매달리게 된 것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기술한 한 대목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호메로스는 트로이 출정에 참여한 그리스 동맹군의 함선목록을 나라별로 열거했다. 이 가운데 크레타 섬에서 참전한 지휘관과 함선 수도 기술하면서 크레타의 특징을 짧게 기술하고 있다. 크레타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인 셈이다. “크레테 인들은 이름난 창수 이도메네우스가 지휘했다.
이들은 크노소스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고르튀스와
뤽토스, 밀레토스, 백악(白堊)이 많은 뤼카스토스, 파이스토스,
뤼티온 같은 살기 좋은 도시에 사는 자들이었고, 나머지는
일백 개의 도시가 있는 크레테 섬 여기저기에 사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름난 창수 이도메네우스와 남자를 죽이는
에뉘알리오스 못지않은 메리오네스가 지휘했다.
그들과 함께 검은 함선 여든 척이 따라왔다.“ (2, 645-652)
크레타 문명은 BC 3650년 경부터 흥성했지만, BC 1450년 경 미케네 군에 의해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한 미노스 왕조가 멸망하면서 퇴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으로 유추하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기원전 13세기 중반까지도 크레타에 일백 여개의 도시가 번성하고 있었고, 80척의 함선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해군력 또한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을 보면,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나라에서 함선 12척을 지휘하며 참전했다. 아테네는 50척을 보냈고, 아킬레우스도 50척을 이끌고 참전했다. 총사령관인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만이 최대 규모인 100척의 함선을 갖고 지휘했다. 이런 상황에서 크레타가 80척의 함선을 참전시켰다는 것은 그리스 동맹군 사이에서 크레타의 국력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고, 당연히 이에 걸 맞는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에번스는 호메로스의 이런 기술을 굳게 믿었다. 당연히 트로이 발굴 이상의 큰 의미와 영향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고고학의 전문지식을 갖춘 정통의 고고학자였다. 따라서 초기에 아마추어의 열정으로 시작했던 슐레이만과는 준비와 접근방식이 달랐다. 에번스는 크레타 섬에 체류하면서 유물들을 수집하고 연구 논문을 쓰는 등 꼼꼼하게 사전 준비를 했다. 드디어 그는 1898년에 크노소스 왕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후 35년 동안 크레타에 머물며 크노소스 왕궁의 유적을 발굴하고 과거의 건축 양식과 벽화들을 복원하는 데 진력했다. 자신의 전 생애를 크노소스에 바친 셈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크노소스의 건축 구조물은 발굴 당시의 원형과 에번스가 평생의 노고를 통해 복원한 구조물이 뒤섞여 있다.
이로 인해 에번스의 일부 ‘창조적’ 복원 작업은 비판적 고고학자들에게 논란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창적인 미노아 문명을 만개시킨 크노소스 궁전의 실체를 세상에 확인시켜 주고, 당대의 모습 중 주요 구조물의 부분적 복원을 통해 당대 유적의 상황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 그의 공로는 매우 크다. 그가 고고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왕실로부터 1911년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은 것도 이런 평가를 뒷받침해준다. 그리스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크노소스 발굴의 과실은 크레타 인들에게 오롯이 돌아간다.
풍요롭던 미노스 문명
미노아 문명이 얼마나 번성했었는가는 크노소스 궁전을 살펴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다. 경제적 풍요는 우선 곡식, 올리브유, 와인, 콩류 등을 저장했던 무수한 대형 항아리 피토이(pithoi)의 존재로 확인된다. 피토이는 보통 150cm에서 200cm에 이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다.
서쪽 저장고에는 피토이 저장을 위한 방들이 무려 4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남아 있던 150개의 피토이가 발굴되기도 했다. 이런 대형 피토이는 한참 훗날의 그리스 본토의 여러 국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다.
피토이를 채운 식품과 식량들은 크레타 섬에서 나는 것뿐만 아니라, 크레타가 지배하던 지중해 곳곳의 섬에서 바친 공물이 상당부분 차지했을 것이다. 이런 저장고는 크노소스 궁에 여럿이 있었다. 남쪽의 ‘여왕의 거실(Queen's Hall)’ 근처에도 큰 저장고가 있었다. 주변의 속국에서 해마다 새로운 진상품과 공물이 쏟아져 들어와 그 많은 피토이를 채웠을 것이다.
‘여왕의 거실’ 인근에 있는 저장고의 피토이들은 2m가 넘는 대형이다. 몸통에 구멍이 뚫린 걸개 또는 손잡이 용도의 고리가 네 줄로 만들어져 있다. 미적 감각과 실용적 목적이 잘 조화를 이룬다.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대형 피토이에서 좀 더 발전된 형태의 대형 암포라(amphora) 유물도 꽤 많이 수집되어 있다. 아래에서 소개한 몸통 중앙을 두른 선과 동그라미 등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암포라는 꽤 오래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위의 입구가 넓고 두툼한 모습이 매우 실용적으로 보인다. 훗날 목 부분이 길어지고 날렵해진 세련된 그리스 암포라의 탄생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려한 미술 작품을 탄생시킨 프레스코화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인들의 창조적 예술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 수없이 많다. 최고의 예술가들은 바로 화가였다. 이들은 인류 최초로 프레스코화를 발명했다. 프레스코화는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미처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신선(fresco)'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매우 이른 시간 내에 완성해야 하는 고난도의 화법이다.
프레스코화는 크레타의 위대한 화가들이 3000여년 이전에 개발한 이래, 수천 년 동안 서양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활용되었다. 16세기 초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에 그린 ‘천지 창조’,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역시 프레스코 기법의 최고 걸작들이다. 유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프레스코화는 수천 년 동안 화가들에게 애용되었다.
프레스코화의 최고의 장점은 보존성이 좋다는 점이다. 유화가 수백 년 보존이 가능한데 비해 프레스코는 천년 이상 원작의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했던 수많은 벽화들을 아직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레스코 기법의 덕분이다.
물론 최초의 아름다운 색조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림의 윤곽과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크레타 화가들의 창작 열망과 예술적 표현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들은 크노소스 궁의 수천 개의 방의 벽면을 사람과 자연, 동물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건물 전체가 미술 작품의 보고(寶庫)가 된 셈이다. 인물 그림들은 크레타 인들의 낭만적 분위기와 아름다운 자태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돌진하는 황소상이나 돌고래 떼의 그림은 동물적 움직임의 특성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생하게 재현해 냈다. 모든 작품마다 예술적 탁월함이 번득인다.
그리핀의 나라 미노스 왕국
왕이 기거했던 공간은 어땠을까? 화려하고 풍요롭던 크레타 문명의 전체적 분위기와 달리 왕의 공간은 매우 검소하고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옥좌(玉座)의 방’은 왕의 공식 접견실로 사용된 듯싶다. 오른쪽 벽면의 가운에서 등받이가 있는 돌 의자가 왕의 옥좌다. 좌우로 벽면을 따라 L자 형으로 이어진 돌 의자가 왕의 측근이나 귀족이 앉았던 자리인 것 같다.
맞은 편 기둥의 하단과 연결된 돌 의자는 왕을 알현하러 온 방문객의 좌석일 듯싶다. 기둥 뒤쪽의 빈 공간은 이층까지 터져 있어 자연 채광이 그대로 들어오도록 했다. 또 아래층의 화로에서 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를 배출하는 환기 효과도 고려했었을 것 같다.
이곳을 발굴한 에번스는 옥좌 맞은 편 뒤의 공간에 몸을 정화하기 위한 욕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 벽면 문이 있는 곳 안에 신께 경배를 드리는 작은 지성소(至聖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그곳에 양날 도끼와 이중 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림의 복원을 담당한 질리에몽과 건축가 파이프에게 상상 복원도를 그리게 하기도 했다.
발굴 당시 ‘옥좌의 방’ 바닥에 흩어져 있던 접시들이 이런 의식 때 사용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럴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아무튼 작은 공간에 여러 가지 기능을 효과적으로 배치한 최고의 천재 건축가 다이달로스의 지혜가 엿보인다. 위층은 ‘파리지엔’ 벽화가 그려진 공간이다.
특이한 점이 또 있다. 옥좌와 다른 인물들의 좌석이 좌우로 동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옥좌의 반대편이나 아래에 위치하지 않고 동렬에 배치했다는 점을 들어 혹 이 공간이 원로원의 회의장이 아닌가 하는 이도 있다. 그것이 주된 해석이 아닌 것으로 보면 왕이 절대적 권력을 가졌다기보다 도시 연맹체의 수장의 성격을 띠었을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옥좌의 방 내부의 북쪽 벽면의 문은 아마 2층이나 지하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호를 위해 출입구를 유리벽으로 막아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아쉽다. 옥좌의 방이 있는 건물의 외관은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2층이 ‘파리지엔’ 그림이 있는 공간이다. 높은 위치에 있었으므로 아마 지하층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500여 년 전에 3층 이상의 석조의 복층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었던 건축술이 놀랍기만 하다.
정면의 넓적한 둥근 돌 그릇 형태의 물건은 불을 피우던 화로로 추정된다. 또 공간의 벽면은 프레스코화로 채웠다. 자세히 보면 독수리의 머리와 아름다운 벼슬에 사자의 몸을 한 그리핀(Griffon) 두 마리가 옥좌를 호위하듯 마주보고 있다. 또 옆 벽면에도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띠를 두르듯 그린 벽화에는 곧은 모양의 식물들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리핀의 앞 다리 위쪽의 몸통 부분에 그려진 동그란 문양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문양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리핀은 금광을 지키는 괴조(怪鳥)로 알려져 있다. 또 아폴론의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졌다는 점에서 미노스 왕조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활용된 것이 아닌가싶다. 그리핀 문양은 훗날 그리스 본토의 여러 나라에서도 신전이나 공공건물의 장식물로 널리 쓰였다.
특히 올림피아에서 발굴된 세발솥의 장식물로 붙어있던 그리핀 상은 크레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몸통의 나선형 문양이 크레타의 그리핀 몸통에 새겨진 기하학 문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크레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미케네 왕국이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크레타의 영향을 추정해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왕의 평상시 생활공간인 사실(私室)에 그려진 ‘8개의 방패’ 그림도 정교하고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이 방패는 나무와 금속으로 구조 틀이 만들어졌고, 겉은 쇠가죽으로 덮였다. 겉면이 얼룩덜룩하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크레타 군의 방패는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간 8자 모양을 하고 있다. 대개 원형으로 만들어졌던 그리스 본토 국가들의 방패와 외형이 많이 다르다. 방패 그림을 왕의 사실 벽면에 프레스코화로 남긴 이유는 군대의 강력한 힘을 가진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걸작 ‘파리지엔’
크레타 프레스코 벽화 가운데 백미는 역시 ‘파리지엔(Parisienne)’으로 불린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이다. ‘파리지엔’ 그림이 그려진 방은 왕의 접견실인 ‘옥좌의 방’의 바로 바로 위층에 있다. 파리지엔은 19세기 당대 최고의 도시적 세련미를 갖춘 멋쟁이의 대명사였다. 비록 퇴색 되었지만 원형 그대로 일부가 남아있는 크노소스 벽화 속의 여인을 보라.
찰랑찰랑한 검은 머리, 특히 이마에 흘러내리는 곱슬머리 가닥이 자유 분망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검은 동공을 가진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붉게 화장한 입술은 고혹적이다. 붉은 줄과 푸른 줄이 세로로 그려진 의상 또한 여성미를 물씬 풍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3500여 년 전의 여인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놀라우리만큼 너무나 세련되고 아름답다. 세계인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파리의 여인’이라 불리는 된 것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렇듯 크레타 화가들의 인간을 그리는 미적 감각은 예술적 표현력은 탁월했다. 전체적으로 크레타 화가들이 그린 여인상들은 하나같이 밝고 경쾌하며 세련된 느낌을 준다. 당대의 화려하고 풍요롭던 크레타의 시대상과 낙천적인 크레타 인들의 성격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싶다.
청춘 남녀들의 의식 행렬, 데메테르 경배?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벽화 중 특별한 관심을 끄는 그림이 또 있다. 제사장 또는 의식을 주관하는 여신의 역할을 하는 여인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여성과 남성 집단이 의식을 행하는 모습을 그린 긴 행렬의 프레스코화가 바로 그것이다.
맨 왼쪽에서는 흑발의 미인 7명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맨 앞의 한 명의 손뼉으로 장단을 맞추며 리드하고 있다 아마 지휘자 역할을 하는 듯하다. 다른 여인은 캐스터넷과 유사한 악기를, 세 번째 여인은 리라를, 뒤의 두 여인은 아울로스(aulos)로 추정되는 관악 피리를, 마지막 두 여인은 편종(編鐘)가 유사한 기능을 할 것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악기의 원형들을 보는 듯하다.
좌우의 남성들이 의식에 바치기 위해 올리브유나 곡식, 와인 등이 들었을 도기를 받들었다. 아마 첫 번째 두 청년은 접시와 와인 크라테르를, 두 번째 청년은 곡식을 담는 항아리를, 세 번째 청년은 올리브유를 담은 암포라를 들고 있었을 것 같다.
제사장 가까이에 있는 좌우 네 명의 남성들은 양손 바닥을 활짝 벌린 채 손을 들어 경배하는 자세를 보인다. 오른쪽 두 청년은 거대한 뿔잔(rhyton)을 받들고 있다. 마지막 각배(角盃)를 들고 있는 청년의 그림 설명을 보니 미노아 프레스코 유물 중 유일하게 두상과 몸통 등을 실물 크기로 그린 것이라 한다.
의식을 주관하는 여사제가 양 가슴을 모두 드러낸 의상을 입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섹시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풍요를 상징하는 젖가슴의 이미지를 강조한 것이 아닌가싶다. 아마 수확의 신이자 풍요와 다산(多産)의 신인 데메테르 여신을 경배하는 의식일 가능성이 높다.
미노아 문명의 대표 이미지 ‘백합꽃 왕자’ 그림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화 중 미노아 문명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쓰이는 그림이 있다. 일명 ‘백합꽃 왕자’로 불리는 그림이다. 인물 주변에 백합이 그려져 있었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신 실물 크기의 그림이다. 에번스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크노소스의 통치자(Ruller of Knossos)’이거나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제사장(priest king)’일 것으로 추정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운동선수 또는 군대 지휘관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주인공의 신분이 어떠했든 위엄과 당당함, 건장함이 넘치는 모습이 크레타 문명의 상징 이미지로 활용되기엔 충분한 것 같다.
프레스코화를 복원한 에번스의 공과(功過)
크노소스 궁전의 수천 개의 방에는 수많은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현재 크노소스 궁전의 공개된 일부 방에 그려진 그림이나,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중인 원본 그림들은 3500여년이라는 세월과 파괴로 인해 온전한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나마 프레스코화로 그려졌기에 당시의 색조를 상당 수준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난 그림들, 일부 파편만 남은 그림들로 전체의 그림 구도를 상상해 내고 원래의 모습을 모사(模寫)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위대한 발굴자 에번스가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크노소스궁전의 찬란했던 문화를 당대 세계인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컸기 때문인 것 같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궁 발굴을 통해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 문명의 기원일 것으로 생각했던 당대의 고고학적 한계를 단번에 뛰어넘었다. 에번스는 크노소스 왕궁에서 발굴한 수백 개의 유물을 통해 크노소스 궁이 미케네 문명과는 완전히 다르며, 훨씬 이전에 흥성했던 크레타 문명의 진원지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에번스는 발굴된 프레스코화의 부분들을 모아 퍼즐 맞추기 하듯 그림의 전모를 추정해 내었다. 그리고 몇몇 그림들을 채워 넣는 복원작업을 단행한다.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복원해 냈는지는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물론 ‘크노소스 궁전은 미노스의 궁전이기도 하고 에번스의 궁전이기도 하다’는 평을 듣기도 할 만큼 그의 복원 작업에 비판적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비판자들이 드는 복원 오류의 예도 물론 있었다. '크로커스를 꺾는 사람'이란 그림이다. 이 작품은 몸통과 팔, 다리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피부색을 표현하는 데 있어 다른 그림들은 대부분 남자는 적갈색, 여자는 흰색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색의 인간? 정원의 꽃밭을 기어가면서 무언가 찾는 것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초기 복원 화가가 사람 얼굴 부분을 보충해 넣었다. 하지만 나중에 잘못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단초는 에번스가 발견했다. 사람으로 치기에는 손과 발의 모습이 너무 가늘고 길며, 구부린 모습이 사람 같아 보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네 발 달리 짐승처럼 보였던 것이다.
얼마 후에 크노소스 궁이 아닌 일반 귀족이나 부자의 집으로 추정되는 일반 주택에의 벽면에서 유사한 그림이 발견되었다. 거기엔 분명히 원숭이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애완동물로 원숭이를 집에서 길렀고 정원을 산책시키는 정경을 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잘못 복원된 그림이 수정 복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아주 일부만 남은 벽화의 전체의 모습을 추정하여 복원하는 일은 그래서 힘들다. 이런 오류도 그림을 복원해 나가는 한 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상당 부분 소실된 그림을 온전하게 복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복원 과정에서 얼마든지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문명이 낳은 벽화 작품들의 독창성과 탁월성에 세계인이 주목하게 한 에번스의 헌신과 노고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그는 복원작업을 통해 근대 고고학의 발굴 및 복원기술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또 하나의 아르 누보(Art Nouveau) 예술이라는 비판과 함께 말이다. (다음 회에는 크노소스 궁전의 건축 및 미노아 문명의 전반적인 예술세계를 다룰 예정이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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