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광장을 가득 채운 1만여명의 한숨...
<현장>벨기에 선제골 터지자 대부분 자리 떠나...
“일본도 10명에 비긴 판국에 2진 선수 10명한테 진 우리가 투혼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냐”
벨기에전 막바지, 한 번의 실수는 분위기를 급반전시켰다. 승리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랐던 응원객들은 "벨기에가 레드카드까지 받았는데..."라며 분노를 숨기지 못한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종료 휘슬이 들리기도 전에 광화문 광장에 인파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후반 33분 벨기에가 선제골을 성공시키자 시민들은 허망함에 할 말을 잃었다. 광화문 광장을 떠나는 응원객들의 표정은 허탈, 그 자체였다. 역전에 큰 기대를 걸었던 만큼 실망은 배가 됐다.
친구들과 함께 밤새 응원했다는 대학생 이모 씨(25·여)는 "벨기에전을 응원하느니 집에서 잠을 더 자는 게 낫다고 호언장담하던 친구를 무시하고 나왔는데 그 친구가 승자가 됐다”며 애써 분을 삭이는 모습을 보였다.
좌절감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발걸음을 뗄 기운도 없다던 대학생 김모 씨(20·남)는 "문제는 팀워크와 수비수다. 홍 감독의 전술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수비 선수들을 더 발굴했으면 좋겠다. 열심히 안 뛰었다기보다는 아직 선수들의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며 선수들 간의 소통과 대표팀의 변화를 주문했다.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막말을 뱉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 대학생(24)은 "앞으로 응원하기 위해 여기까지 나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경기를 기다린 시간이 아깝다고 분노했다. 함께 있던 친구도 "한국을 아시아 축구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치켜세우며 지켜보는 눈들이 많았는데, 결과는 망신스럽다"고 질책했다.
경기 도중 다시 맥주 캔을 집어 드는 사람부터 아예 돗자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는 사람, 세월호 서명운동에 참여하고 바로 귀가하겠다며 자리를 정리하는 사람,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까지 이들에게 경기 결과는 뒷전이 돼버렸다.
4년을 기다렸던 월드컵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벨기에 선수가 퇴장당하며 전세가 기우는 듯 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16강의 한 줄기 희망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조금 더 믿고 지켜보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대학생 박모 씨(21·여)는 "솔직히 알제리 전에서 홍명보 감독에 대한 여론이 많이 안 좋아졌다. 최근 '의리 논란'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라며 "오늘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뛴 것 같다"고 선수들을 다독였다.
여자친구와 처음 거리응원을 나왔다는 최모 씨(20)도 "알제리 전에서 전반에 무너진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홍명보 감독을 지켜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만의 스타일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줘야한다 "고 홍 감독에게 신뢰를 보냈다.
27일 16강행을 결정짓는 H조 3차전 벨기에와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예상보다는 많은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알제리전(4만 여명)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줄었지만 경기 직전 응원 열기는 어느 때 보다 뜨거웠다. 이날 참가인원은 경찰추산 1만 5000여명.
특히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 거리응원을 즐기기 위해 대거 몰려 나왔다. 알제리전의 실망은 애써 부정하는 모습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 '붉은 악마' 머리띠를 하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대표팀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표팀 선발 명단이 공개되는 순간, 모두가 한 마음으로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승리를 자신하는 구호와 함성이 들려왔다.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처음 출전한 골키퍼 김승규의 빛나는 선방에 시민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성적으로 응원을 보냈다. 전반전 내내 골은 터질 듯 터지지 않아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번 월드컵에서 국민들은 승리의 기쁨을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했다. 간절히 두 손 모아 원했지만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에서 골망을 가르는 통쾌함을 선사하지 못해 가슴 속 깊이 아쉬움을 남겼다.
16강 진출을 목표로 했던 한국 축구대표팀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에 '붉은 악마'는 4년 후에도 기대에 부풀어 거리에 모일 것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2002년의 희열을 다시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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