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이익실현 때문에 '먹튀'를 편들건가"
<해외투기자본 이대로 놔둘건가/전문가진단>신장섭 싱가포르대 경제학과 교수
"차등의결권·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수단 늘려도 모자랄 판"
“경제민주화는 정치민주화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민주화의 공식을 경제민주화에 그대로 도입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국내 기업 환경에 맞게 경제민주화의 정의를 재정립해야 합니다.”
최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학 경제학과 교수(53)의 격앙된 목소리와 눈빛에는 진한 안타까움이 배어있었다.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엘리엇 사태에서 시작된 그의 거침없는 이야기는 국내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견으로 이어졌다.
신 교수는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도입 필요성을 제기한 차등의결권 제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선거에서 1인 1표제는 좋은 정치 민주화 수단이지만 기업에서 1주 1의결권제는 꼭 그렇지 만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1주 1의결권제가 거의 공식화돼 있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기업 가치와 비전을 보고 장기적으로 주식을 보유한 투자자와 단기 차익만 노리고 투자하는 이들에게 같은 의결권을 주는 것은 아니다”며 “기업마다 다른 특성들이 있는 만큼 1주1의결권제든, 차등의결권제든 기업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 교수는 대표적인 기업친화적인 경제학자다. 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의 대담을 엮어 지난해 펴낸 저서 ‘김우중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기업을 넘어서 국가 경제발전을 논하는 민족주의 경제학자 같은 풍모가 느껴졌다.
약 1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도 그는 최근 엘리엇 사태를 놓고 국익 우선주의를 주창하는 등 막힘없이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
다음은 신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최근 토론회에서 엘리엇을 국제 ‘알박기펀드’로 지칭했다. 포퓰리즘을 가장해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집단이라고 비판한 이유는?
"엘리엇은 그동안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해 온 전형적인 행동주의(액티비스트) 펀드다. 이는 기업들뿐만 아니라 칠레·아르헨티나·아프리카에서 한 행동에서 이미 증명됐다.
이번 사례도 보자.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장기투자자가 아니었다. 최근에야 주식을 매입한 뒤 합병비율과 경영권 승계를 들먹이며 이번 합병이 불공정하고 잘못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방해하기 위한 ‘알박기’로 밖에 볼 수 없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이 왜 엘리엇와 같은 해외 헤지펀드에게 흔들리게 됐는지 잘 이해를 못하는 이들이 많다.
"IMF 사태 이후 금융시장 개방이 지나치게 확대되면서 일어난 결과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기업에 대한 정책과 제도에 있다고 본다. 제도와 정책을 도입할 때 현실을 감안해야 하는데 이상적인 것으로만 판단해 추진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찌보면 이번 사태는 삼성 등 대기업들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다.
순환출자로 인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기업들이 지주회사 체제 전환 과정에서 안정적 경영권이 확보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오는 17일 임시주총에서 표 대결이 관건이 됐다. 단일주주로서 가장 큰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국민연금이 사실상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된 공적기금인 것을 감안하면 취해야 할 선택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물론 주주로서 이익 실현도 중요하지만 그 성격상 국익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표기업이 외국 자본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이익을 실현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는 기관투자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리나라 말고도 다양한 국가에 투자 포트폴리오가 형성돼 있어 자금을 철수해 다른 나라로 옮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국내 비중이 가장 높은 만큼 맘대로 뺄 수도 없지 않겠는가. 결국 국내 기업들이 잘 돼야 수익을 내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엘리엇 이외에 삼성물산 소액주주들도 이번 합병에 반대하고 나섰다. 합병으로 인해 피해를 본다는 주장인데, 과연 그런가."
"주주들로서야 더 많은 주식을 받으면 더 좋은 것 아니겠나. 하지만 생각해 봐야할 것은 정말주주들이 손해를 봤냐는 것이다.
합병 발표 이후 삼성물산 주가가 20%나 올랐다. 제일모직이라는 삼성 핵심 회사와의 합병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것이다.
주가 상승으로 인한 이익은 생각하지 않고 합병 주식 수만 언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일반주주들도 몇 주를 더 받느냐는 당장의 이익보다는 합병이 가져다 줄 시너지효과로 주가가 얼마나 오를 수 있느냐는 장기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일환이라는 점에서 합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있는데 ….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정거래법을 시행하고 경영권 승계에 가장 비우호적인 제도를 채택한 것도 재벌에 대한 반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물론 과거 재벌들의 잘못된 과오가 원인이 된 것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재벌과 같은 가족경영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반문해보자. 전문경영인 체제가 무조건 선이고 가족경영이 무조건 악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이상적인 기업관으로는 전문경영인체제가 옳을 수 있지만 가족 경영이 기업의 중장기적 투자에서는 유리하다는 장점도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가족 경영이 전문 경영보다 성장성과 이익성이 더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버크셔해서웨이·듀폰·루이비통모엣헤네시(LVMH·루이비통의 모기업) 등 유명기업들도 가족경영체제다. 결국 가족경영과 전문경영을 바라보는 시각이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최근 수년간 형성된 반 재벌 정서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공익재단을 통한 경영권 승계 방안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국내 평균 상속세 최고세율(50%)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일본 다음으로 높은 수준으로 이를 낮춰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당장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경영권 승계 비용을 줄이면서도 가족경영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처럼 공익재단을 통한 승계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웨덴 최대 기업 그룹인 발렌베리의 1대 주주는 발렌베리 가족이 아니라 공익재단이다. 이는 삼성이라는 국내 대표 기업이 국민 모두를 위한 공익적 기업그룹이 되는 긍정적 변화를 꾀할 수 있다. 또 재단 승계를 통해 상속비용을 공익재단에 들어가게 해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승계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 제도가 먼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안정적인 기업 경영권 보장을 위해 차등의결권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다. 차등의결권 제도가 재벌 총수 일가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지적이 있다.
"엘리엇과 PSAM 등과 같이 단기적으로 이익을 취하려고 들어온 주주들과 장기주주들은 동일하게 대우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회사의 장기적 가치와 비전을 보고 오랫동안 투자하는 이들에게 의결권을 많이 줘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의 요지다. 구글도 월가 자금 횡포 막기 위해 차등의결권 도입하지 않았나. 이후 소수 지분으로 의결권 비율 높여 경영권이 안정되면서 성장하고 있다.
단지 총수 일가에 의결권을 더 많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액주주라도 장기 투자자들한테는 똑같이 의결권을 더 많이 주자는 것이다. 또 차등의결권을 모든 기업에게 다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경직적으로 1주 1의결권 적용하는 국가는 없다."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도입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인데 장기투자자들을 우대하는 측면에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해 외부 공격에 신경쓰지 말고 기업 경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 자사주 매입이나 우호지분 확보 등에 엉뚱하게 쓰는 비용을 차라리 투자로 전환하는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의결권 문제 때문이라면 이번과 같은 자사주 매각 제도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정말 모르는 소리다. 삼성물산이 KCC에 자사주 매각하면서 의결권이 살아났는데 삼성물산은 운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KCC는 제일모직 대주주이기도 해 직접적인 이해가 걸려 있으니 선뜻 '백기사'로 나선 것이다.
하지만 기업들이 외부 공격 상황 발생하면 이러한 여건이 안 되는 곳이 대부분이다. 상호 신뢰가 강하고 목표 지향점도 같아야 하는데 찾기 쉽지 않다. 의결권 살리려다 자사주 잘못 처분하면 자자수 매입한 기업이 되레 공격할 수도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최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상장사의 자사주 처분을 제한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경영권 방어 수단을 더 늘려도 모자랄 판에 있는 것도 없애겠다는 것은 국내 대기업들이 무조건 싫다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정말 국내 경제와 기업들의 현실을 생각은 하고 있는 건지 답답하다.
경영권 남용을 방지하는 법안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경영권 남용 방지 법안에 쏟는 노력만큼 안정적인 경영권 확보를 위한 법안에도 신경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경영권 관련 법안에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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