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 불만 커지고 김정은 비판 늘자 불만 다른데 돌리려는 의도?
북한의 위협은 고저는 있었지만 언제나 존재…문제는 우리정부 대응
‘평화’는 결과이지 전략 아니다…평화 너무 내세우면 국민은 포로나 노예가 될 뿐
북한 김씨 왕조가 요즘 ‘깡패국가’의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깡패’ 중에서는 그나마 의협심이 있는 ‘건달’이라기보다, 거지근성이 있는 ‘양아치’ 수준이다. 위기에 몰리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살랑거리다가, ‘쓸모가 없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표변해 멱살을 잡는다.
요즘은 김여정이 막말로 총대를 맺다.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문재인 대통령이 ‘김여정 팬클럽’ 운운하며 추켜세울 때 수줍은 모습을 보였던 그녀다. 남북정상회담과 대남특사로 왔을 때는 ‘평화의 사절’로 비췄다. 국민들은 ‘생각보다 착하네’ 할 정도로 이미지 조작에 능했다. 공자는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서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을 하는 사람은 어진 사람이 적다(巧言令色, 鮮矣仁)”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발언을 보면 영락없는 ‘백두혈통’이다. 도둑의 ‘수괴집안’ 혈통답다.
김여정은 김정은의 친동생이다. 김정일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녀를 4명 두었다. 장자인 김정남은 이복동생인 김정은이 독살했다. 김정은의 동복인 작은형 김정철은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한다. 생존의 비결이다. 어머니가 같아 김정남과는 다르지만, 언제든지 권좌에 위협이 된다면 처단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이리다. 김정은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성실한 조력자’로 활동하는 유일한 핏줄이 김여정이다. 그녀는 김정은의 기대에 부응해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짐)’의 달인이다.
그런데 김정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고 있는 김여정이 '평화의 메신저'에서 '남북관계 파국'의 주역으로 돌변한 것이다. 역시 백두혈통다운 변신이다. 김정은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평양으로 초청해 인민 앞에서 추켜세웠기 때문이다. 위신을 중시하는 독재자에게 일정한 범퍼가 꼭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은 자신의 아바타인 김여정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리라.
김정은은 언제나 ‘인민의 삶’을 운운하지만, 본질적으로 ‘백두혈통’의 헤게모니 유지가 제일 중요하다. ‘비핵화’ 속임수로 시간을 벌며 제제를 피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항구적으로 벗어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일 것이다. 북미협상 초기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적당히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도 않았고 문재인 정부도 그리 유능하지 못했다. 결국 김정은 입장을 바꿨다. ‘토끼를 잡을 때 쓰던 개(토사구팽[兎死狗烹]의 그 개)’가 호랑이를 잡는 데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 개를 다그쳐 호랑이에게 달려들게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삶아먹는 전략으로 선회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팬데믹>이 예외 없이 북한도 덮쳤다. 유행병 전파는 알 수 없으나 경제적 피해는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나마 북한경제를 지탱해 오던 ‘장마당’도 이전 같지 않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세계경기의 추락은 바로 북한경제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받아도 먹고살기 힘들면 나라님을 욕하는 법이다. 인민의 불만은 커지고 김정은에 대한 비판도 늘어났을 것이다. 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는 독재자로서는 상식이다. (미국 트럼프가 북한문제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문재인 정부는 어김없이 이런 북한의 의도에 휘둘리고 있다. 문 대통령 대북정책 멘토인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말이 상징적이다.
옥류관 주방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국수 처먹을 때는 요사 떨더니”라며 막말을 하자, 그는 엉뚱하게도 “이러한 모욕, 수모를 당하게 만든 건 미국이다”라고 미국에 책임을 돌렸다. 한두 번이 아니니 ‘정권핵심’의 말이야 그렇다 치지만, 문재인 정부는 실지로 공권력까지 그들의 말에 맞게 멋대로 악용하고 있다. 북한의 의도는 다른데 있는데, 그들이 트집 잡는 ‘북한인권단체 대북삐라’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이어 통일부 등 관련 정부부처는 우리국민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보다, 북이 ‘꼬투리잡기’로 성토하는 탈북자 응징에 앞장서고 있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는 격’이다. 우리정부가 ‘단호한 조치’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북에서는 ‘이미 늦었다’며 딴전을 피운다. 나아가 ‘군사적 보복’ 운운하며 우리국민을 겁박하고 있다. ‘대북삐라’가 원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정부는 ‘대북삐라 봉쇄’와 ‘그 주체에 대한 법적 처벌’을 공언하며 대북관계 개선의 해법을 찾고 있다. 껄끄러운 ‘김씨 왕조’보다 만만한 우리국민을 위협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대국에 인신조공을 바쳤던 무능한 조선왕조와 비견되는 행태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지금의 북한이 동급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니 더욱 한심하다.) 정부와 여당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접경지대 주민의 안전’이다. 친여 매체는 접경지대 주민들의 인터뷰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의 도발이 꼭 접경지대일 이유는 없다. 접경지역 주민에 대한 위해는 다양한 도발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 목소리가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없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평화’는 결과이지 전략이 아니다. 평화를 너무 내세우면 나라가 비루해지고 국민은 포로나 노예가 될 뿐이다. 북에 삐라를 보내면 북이 접경지대 주민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북한인권단체의 행동을 저지한다면, 독립군의 활약이 간도 동포들을 위태롭게 한다며 독립군을 성토했던 친일파 인사들과 무엇이 다른가. 1920년 일본군은 독립군에 패배하자 간도의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우리가 독립군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성과를 치하하고, 간도주민의 희생을 애석해하며 기릴 뿐이다. 비판의 대상은 일본군이지 독립군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작 비판해야 할 북한은 놔두고 북한 인권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국민을 처벌하겠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원칙이 중요하다. 인질범에게 몸값을 주고 사정하면 몸값만 올라갈 뿐 아니라,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설혹 몸값을 준다 해도 공개적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깡패에게 굽실거리는 모습은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모양이 왕관 같아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붙였단다. 이름 때문인지, 코로나19는 미국도 쩔쩔매게 할 정도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치사율’로만 보면 흑사병에 비할 바가 아니고 미국독감보다 높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심리적 압박’은 독보적이다. 세계에 칸막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인적교류차단으로 제어할 수 있지만, 공포는 빛의 속도로 전파된다. 그래서 팬데믹이 두려운 것이다. 북한의 위협은 고저는 있었지만 언제나 존재했다. 문제는 우리정부의 대응이다. 의연하지 못하고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한다면, 평화는 고사하고 ‘북핵공포 팬데믹’의 발원지가 될 수 있다.
글/김우석 국민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