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TAD, 지난달 무역개발이사회
우리나라 개도국 → 선진국 변경
세계 최초…국제사회 역할·기대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지난달 2일 우리나라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선진국 지위 변경으로 국민 생활에 특별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지만 1964년 UNCTAD 설립 이후 첫 사례인 만큼 국민적 자긍심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이번 지위 격상은 급성장한 경제와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이 반영된 결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이미 경제와 외교 등 사실상 선진국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번에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하게 선진국으로 공인 받은 셈이다.
전문가들은 선진국 지위 격상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리더십 정립과 역할, 책임도 그만큼 커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개도국에 대한 경제 지원과 협력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하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가교 역할도 주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번 선진국 지위 변경에 대한 의미와 국제사회 속 우리나라 역할 변화 등을 정부는 물론 국가 전체가 전방위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UNCTAD가 키워낸 모범생 한국
UNCTAD는 1964년 선진국과 개도국 간 경제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설립한 국제연합(UN) 총회 상설기관이다. 무역 관련 최고 UN 기구로 국가 간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아 경제 격차를 줄이기 위한 조직이다. 우리나라는 1964년 3월 가입했다.
지난달 2일 UNCTAD는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만장일치 의견으로 우리나라 지위를 선진국으로 인정했다. 정확히는 UNCTAD 내 4개 그룹 가운데 B그룹에 우리나라를 포함하기로 한 것이다. UNCTAD 내 A그룹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이 B그룹은 미국 등 31개 선진국이 포진돼 있다. C그룹은 중남미 국가, D그룹은 러시아와 동유럽권 국가들로 이뤄져 있다.
A그룹에서 B그룹으로 위치를 옮긴 것은 UNCTAD 설립 이후 최초다. 그룹 내 모든 국가 동의가 필요한 만큼 이번 결정이 더욱더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태호 주제네바 대표부 대사는 “과거에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동하려는 시도는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정치 등 이유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며 “우리나라는 이번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진국 결정은 상징성에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최초라는 것도 그렇지만 UN 원조를 받던 나라가 모범적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는 1964년 UNCTAD 가입 이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무역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게 바로 UNCTAD라고 말할 정도다.
그렇게 도움을 받던 나라가 57년 만에 선진국으로 도약했다는 사실은 UNCTAD 존재 가치를 높여준다. 결과적으로 UN이 가난한 나라 한국을 모범생으로 키워낸 게 되기 때문이다.
선·후진국 모두 경험…가교 역할 기대
국제사회는 우리나라가 후진국과 개도국, 선진국 모두를 경험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현재 UNCTAD 내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을 잇는 가교 역할로 우리나라만큼 제격인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A 그룹에서 만장일치로 한국의 선진국 진출을 환영한 것도 이러한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가 UNCTAD 가입 당시 5억 달러에 그치던 무역액은 지난해 9756억 달러로 약 1880배 늘었다. 수출액 규모로는 4465배 증가했다.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 가운데 15위 규모로 개발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됐다. 이런 과정 때문에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 자신들 입장을 이해해 줄 적임자로 우리나라를 꼽는다.
실제 UNCTAD 결정 당시 주제네바 파키스탄 대표부 대사는 아시아·태평양 그룹을 대표해 “한국이 여러 그룹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주기를 희망한다”며 향후 역할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김대호 글로벌경제연구소장은 “개도국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국가가 한국”이라며 “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앞으로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UNCTAD를 통해 도움받던, 식민지를 갓 벗어난 나라가 자력으로 선진국 중심으로 컸다는 것은 상징성에서 대단한 것”이라며 “앞으로 UNCTAD 내에서 제2의 한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가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것은 국제 경제학 차원의 업적”이라고 덧붙였다.
미·중·일 교훈, 국제사회 역할 고민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 가교 역할과 함께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 ‘리더(leader)’의 역할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와 사회, 문화 등에서 모범이 되는 것은 물론 해당 분야를 이끌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박태영 외교부 국제경제국장은 “국제사회 규범 형성이나 국제현안 해결에도 더이상 추격자가 아닌 선도자 관점에서 인식하고 행동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국장은 “이러한 선도적 역할을 위해 세계 10위 경제 규모, 한류를 중심으로 한 문화강국, 혁신과 디지털 강국 등 우리의 강점을 활용해야 한다”며 “우리 강점을 통해 국제사회가 처한 공동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고 우리 국민과 기업에도 혜택이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우리와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밀접한 국가들을 통해 앞으로 우리 역할을 조명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무대를 이끄는 대표 선진국이다. 반면 중국은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미국과 중국 차이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도 우리에겐 좋은 본보기다. 한때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지금은 ‘잃어버린 20년’을 논하는 상황이다. 무엇이 일본을 어렵게 하고 있는지 살펴 우리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로부터 선진국으로 인정받은 것에 도취하기 보다 선진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이바지할지 고민해야 한다”며 “기후변화와 디지털 격차, 보건 위기, 글로벌가치사슬공급망(GVC) 재편 등 국제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집단적 책임을 끌어낼 수 있는 조정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제는 리더②] 미·중·일로 보는 선진국 의미·역할·방향에서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