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연애는 언젠가 끝난다. 운이 좋다면 결혼을 해서, 그렇지 않다면 이별을 해서, 그런데 어떤 연애는 고백과 동시에 끝이 난다. 모아 놓은 마음은 이젠 줄 수도, 버릴 수도 없고. 친구라는 좋은 말은 세상 제일 서러운 말로 바뀌고. 어떤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난다.”
지난 24일 종영한 tvN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연출 정지현, 극본 이미나) 7회에 나온 대사다.
심장 이식을 받아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는 주영도(김동욱 분)는 강다정(서현진 분)을 좋아하게 됐지만 사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의지와는 달리 몸은 다정에게로 달려가고 봄날에 내리는 눈을 핑계 삼아 ‘미친 짓’도 했건만, 사귀자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늘 남을 돕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다 못해 결혼이라는 인생 중대사마저 안가영(남규리 분)에게 내줬던 영도지만, 정작 자신이 남의 도움을 받는 일에는 익숙지 않다. 하물며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상처가 되고 마음의 짐이 될까 봐 마음을 꾹꾹 눌러 온 참이다.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는 법, 더 이상 감추기 힘들고 참을 수 없어 코를 찡긋 입술을 실룩한 뒤 기껏 한다는 고백이 “우리 친구 할래요?”가 전부다. 세 번의 ‘쓰레기’ 같은 연애를 했던 다정은 연애 따위 필요 없다는 듯 살고자 했는데, 자꾸만 영도에게 마음이 가고 주위를 맴돌고 ‘미친 짓’에 신나서 동참한다. 부지불식간에 방어할 틈도 없어 좋아진 남자가 드디어 고백하는데, 진심을 담아 자신의 마음을 표하는데, 애인 아니고 ‘친구’ 하잔다.
어릴 적 입은 상처에 이유를 대고 비뚤게 자라기는커녕 올곧게 자라 타인을 여유로 대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란 다정. “우리 친구 할래요?”라는 못난 고백을 듣고 영도의 집을 나와 버스정류장에 앉아 생각한 게, 맨 처음 적은 글귀다. 마음이 쏠리는 이로부터 들은 고백, 분명 사랑의 고백이지만 ‘친구’라는 선을 긋는 고백, 배려심 넘치는 영도의 안타까운 고백과 함께 다정과 영도의 연애는 그렇게 끝이 나는 듯했다.
말이 참 기막히다. 모든 연애는 끝난다, 이별해서든 결혼해서든. 아, 결혼도 연애의 끝이지…라고 공감하려는 순간 한 방 맞는다. 아이코, 고백이 결별 선언이 될 수도 있구나.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도 전에 그렇게 끝이 나는 연애도 있겠구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화면에 보이는 다정과 화면 밖에 있는 영도가 안쓰러운 순간, 다정이 일어선다. 모아 놓은 마음 다시 줄 수 있으려나 버리지 않아도 되려나, 친구라는 좋은 말을 세상 제일 서러운 말이 되지 않게 친구로 시작해 연인으로 가는 길을 다정이 내려나 기대를 키운다.
역시나, 다행히, 다정은 영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연애에 대해서만큼은 자신보다 더 여리고 어리숙한 영도를 향해 먼저 다가가 포옹한다. 위로한다. 신기한 건, ‘아, 이제 둘이 사귀겠네’라는 뻔한 답으로 속행하지 않게 하는 힘이 드라마 ‘너는 나의 봄’에 있다. 작가와 연출의 의지와 의도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훌륭히 표현해낸 배우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그저, 선한 어른 다정이 상처 입은 열한 살 영도를 “괜찮아” 토닥여 주는 인간미가 크게 보인다. 포옹으로 연애가 재개되지 않아도, 두 사람 연애의 마침표를 지운 것은 분명하리라는 희망만으로도 따뜻하다.
마음에 지우기 힘든 흉터를 안고 사는 혹은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게 벅찬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기막힌 명대사를 회차마다 뿌려놓는 이미나 작가의 필력, 로맨스와 코미디와 스릴러를 유연하게 오가며 깊이 있는 연출력을 과시한 정지현 PD, 작가와 감독이 상상하고 구축한 세상과 신선한 캐릭터들을 멋지게 표현해 시청자 가슴에 따뜻하게 배달한 배우들.
그 이름은 정말 마지막 단역 한 사람까지도 다 부르고 싶을 만큼 모두 제 몫 이상을 해냈는데 그 중심에 김동욱, 서현진, 오현경, 남규리, 윤박, 이해영이 있다. 주연급 배우 지승현이 ‘짐승 몸매’를 감추고 감수성 풍부한 서하늘, 영도 친구로 간간이 출연할 정도면 말 다 한 캐스팅이다. 백현주, 김예원, 김명준, 황승언 익숙한 얼굴은 물론이고 새로 이름을 기억하고 싶은 박예니, 김서경, 한민, 윤지온, 김리우까지 ‘배우 맛집’ 드라마다.
개인적으로 김동욱의 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연기 잘하는 배우,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 말 못 하는 어머니(예수정 분)와의 대화로 1440만 국민을 울린 연기파 김동욱은 ‘너는 나의 봄’으로 배우로서의 ‘다음 장’을 열었다. 주영도를 통해 김동욱이 얼마나 따뜻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배우인지, 얼마나 멋진 분위기와 훈훈한 미모를 지닌 남자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뛰어난 정신과 의사의 명민함과 사랑 초보의 어리숙함이 자연스레 어우러졌고, 타인을 한없이 배려하는 넉넉한 가슴과 건강에 관련해 약점을 지닌 여린 마음이 공존했다.
인생 연륜에 비례해 입만 열면 명대사를 뱉은 오현경 역시 ‘미스코리아, 배우 되다’라는 실감을 안겼다. 인형 같은 외모는 연기력을 감추기 마련인데 마치 사이버세상에 사는 것 같은 외모로 개성 넘치는 열연을 보여 준 남규리, 1인 2역의 열탕과 냉탕을 오간 윤박은 내일이 더 기대되는 배우다. 이해영은 준비된 배우는 언제든 극의 중심을 잡고 자신의 매력을 보여 줄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서현진은 가장 평범해서 우리 같은 캐릭터 강다정을 맡아 드라마에 ‘돗자리’를 깔았다. 기본기 탄탄한 연기력, 상대 배우들과 호흡을 척척 맞춰내는 순발력으로 모두의 분발을 촉구했다. 캐릭터에 맞춘 듯 달라진 화장법이 처음엔 낯설었는데, 다음번엔 더욱 강렬한 캐릭터로 재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촉발하기도 했다.
기사의 제목이나 시작 모두 드라마 대사를 인용하고도 ‘명대사’ 코너로 소개하지 않고 ‘결정적 장면’ 문패를 단 이유가 있다. 진심과 반대로 말하는 상대를 넉넉히 안아주는 다정보다는 울먹이며 “우리 친구 할래요?”라고 말하던 영도가 우리 모습에 가깝고, 그래선지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히질 않아서다.
숱한 명대사보다 영도의 울먹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욕심내고 싶지만 참아내려 애쓰는 그 모습. 사랑하는 이에게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내 마음속을 읽어낸 상대가 다시 돌아와 안아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여린’ 우리 자신 같아서다. 그리고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은 그렇게 아직 겨울을 서성이고 있는 우리에게 ‘봄’을 보여 준다.
역설적이지만, 지친 마음의 우리에게 기꺼이 봄이 되어 준 드라마는 ‘시청률의 봄’을 맞지는 못했다. 시청률이 전부는 아니고, “인생 드라마” “명작”이라고 뜨겁게 박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게 소중함을 안다. 그러함에도 티빙이든 넷플릭스를 통해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을 꼭 정주행하길 희망한다.
제작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고지 100매의 기사를 쓴다 해도 다 전할 수 없는 인생의 맛이 담긴 대사와 장면, 사랑스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배우들이 거기에 있어서다. 홈페이지도 한번 둘러보라. 세상에, 캐릭터(연기한 배우가 아니라 극중 인물!) 이력서에 저서와 활동 이력, 필모그래피를 공개한 드라마가 또 있었을까 싶게 정성 가득하다.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면 힐링이 된다. 그래서 친구도 만나고 연인도 만나 내 힘들었던 하루를 쏟아내며 방전된 오늘을 충전한다. 신기하게도 드라마 ‘너는 나의 봄’을 시청하는 일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얘기를 털어놓고 토닥임을 받는 기분에 휩싸인다는 것이다.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클릭, ‘너는 나의 봄’과의 연애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