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한 접근 부족한 총량 관리
성과도 없이 서민 고충만 늘어
정부의 억지춘향식 대출 규제에 금융 시장이 멍들고 있다. 시장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기보다는 '무조건 이 안에서 막겠다'는 식의 이른바 총량 규제를 고수하면서 부작용이 커지는 모습이다.
금융당국은 올해 연간 가계부채 증가율을 5~6%대로 묶겠다는 가계부채 관리 방침을 지난 4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특히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당국의 수장이 된 올해 8월부터는 은행권을 향한 압박 강도가 더욱 거세졌다.
마침내 NH농협은행이 은행들 중 처음으로 주택담보대출 전면 중단을 선언하며 백기를 들었다. 이후 다른 은행들도 하나 둘 대출 축소에 동참하면서 금융소비자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그러자 시장 곳곳에서 대출 원칙이 무너졌다. 고신용자가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해 제2금융권과 대부업체를 노크하기 시작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충분하고 담보도 확실한데 이전보다 비싼 이자의 대출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불만이 쌓여 갔다.
상환 여력이 아니라 선착순으로 대출이 이뤄지는 기현상도 빚어졌다. 은행들이 금융당국의 방침을 지키기 위해 지점별로 월별 대출 한도를 정하면서다. 이 때문에 높은 신용도를 가진 차주보다 먼저 은행을 찾은 사람의 대출 가능성이 커졌다.
여론은 폭발했다. 이러다 전세대출도 못 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공포 심리가 확산됐다. 끝내 대통령까지 나서 전세대출이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나서야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됐다.
전세대출에 대한 규제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던 금융당국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6%를 웃도는 가계부채 증가율도 용인하겠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사실상 대출 총량 규제에 실패했음을 자인한 셈이다. 제대로 된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대출 실수요자인 서민의 고충만 확대돼 왔다는 얘기다.
실제로 은행에 대한 총량 규제를 강화했음에도 가계부채 증가세는 더 가팔라졌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9월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6조5000억원 늘었다. 전달(6조1000억원)보다 증가폭이 4000억원이나 더 커졌다.
문제는 규제의 후진성이다. 예전보다 금융 시장의 구조가 고도화 된 만큼, 각 업권은 물론 개별 금융사의 현 주소까지 들여다보는 핀셋 정책이 필요한 환경이다. 어떻게든 대출 총량만 지키라는 규제는 과거 개발 경제 시대에나 가능했던 구시대적 발상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내년에도 기존 방침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내년 가계부채 증가율 목표를 4%대로 제시하면서 더욱 강한 규제를 예고하고 있다.
금융 시장은 경제의 혈관이다. 길을 막아버리거나 강제로 방향을 틀어 잘못을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괄적인 대출 총량제는 어떻게든 혈압만 목표치에 맞으면 된다는 소리다. 이제는 혈관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는 세밀한 정책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