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日 등 팹리스·파운드리 역량 확보로 '반도체 강국' 잰걸음
메모리 강자 韓, 전체 밸류체인 감안한 청사진으로 R&D·시설투자 나서야
"메모리 역량 강화 및 설계·위탁생산 강화로 글로벌 시장에 선제 대응 필요"
코로나19에 따른 펜트업 효과(Pent-up effect)가 소멸되고 경기침체가 글로벌 전역을 뒤덮으면서 반도체 산업에 유례없는 한파가 불어닥쳤다. 수요 부진과 가격 하락 이슈는 올해 내내 제조사들을 괴롭힐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를 둘러싸고 미·중의 힘겨루기와 기술 강국들의 움직임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한국의 돌파구 마련도 더욱 시급해졌다. 기로에선 반도체 산업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주]
"세상에 없는 기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을 발굴하자."(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신년사)
"올해는 도전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 신년사)
'경제 위기' 파고가 글로벌 전역을 뒤덮고 있다. 삼성, LG 등 주요 그룹들은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경기침체, 고환율·고물가·고금리 환경이 올해에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사실상의 비상 경영 체제로 전환, 위기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는 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장기 침체 쓰나미는 올해 반도체 산업에도 적잖은 타격을 미칠 전망이다. 수요 저조로 반도체 재고가 하릴없이 쌓이면서 제품 가격 역시 속수무책으로 떨어지고 있다. 올 하반기까지는 혹독한 '반도체 한파'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으로, 반도체 업체들은 '쇄신과 혁신에 따른 생존'을 주요 경영화두로 삼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불황 대응에만 초점을 둘 것이 아니라 '혹한기'를 기회로 삼아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 미래성장을 위한 토대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초격차 기술 우위를 갖추고 있는 기업이야말로 '반도체 봄'이 도래할 때 가장 막대한 수혜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반도체 기술 강국 및 기업들은 이 같은 체질 개선을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시황에 민감한 D램·낸드 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보다는 경기 영향을 덜 받는 반도체 설계(팹리스)·위탁생산(파운드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R&D·시설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미국, 일본, 대만 등은 경쟁국 중 가장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공동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설계 부문에 200억~300억 달러(약 26~39조원) 규모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같은 투자를 통해 미국 본사 소재 설계 기업들의 연간 매출 규모는 4500억 달러(약 585조원)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이 강점을 가진 반도체 설계 능력에 역량을 쏟아야만 중국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와 더불어 미국 인텔은 파운드리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23년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하고 2024년 하반기에는 2나노 제품을 양산해 파운드리 1위인 TSMC를 뒤쫓겠다는 전략이다.
일본도 파운드리 역량 확대를 위해 주요 기업들이 힘을 합쳤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일본 기업 8곳이 뭉친 신설 기업 라피더스를 통해 일본은 2027년 2나노 이하 제품 국산화를 실현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기존 핵심소재 및 제조장비 분야 강점을 유지하는 동시에 첨단 기술 및 제조 공정 능력도 함께 제고하겠다는 청사진을 드러냈다.
미국·일본이 파운드리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산업연구원 등 전망·분석기관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이 대만·한국 양강 구도에서 2027년에는 대만·한국·미국·일본 4강 체제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인텔, 라피더스 등이 미국과 일본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대만을 바짝 추격하고, 애플, 엔비디아, AMD, 퀄컴 등 빅테크를 고객사로 둔 대만 TSMC도 기술 개발에 주력하면서 이 같은 경쟁구도가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TSMC(59%), 삼성전자(12%), 대만 UMC(7%), 미국 글로벌파운드리(6%) 순이다.
이같은 글로벌 국가들의 초격차 기술 전략에 발 맞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도 첨단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오랜 기간 강자로 군림해오고 있지만 반도체 설계·위탁생산에서는 아직 가야할 길이 먼 상황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첨단 기술 조기 확보 등으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2030년까지 1위를 차지하겠다는 중장기 전략을 공개했지만 현재 12%의 점유율로는 4배 이상 격차를 보이고 있는 TSMC를 단기간에 넘어서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 대만 등 경쟁국처럼 우리나라도 민·관이 협력해 기술 우위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기업이 글로벌 생산설비 투자와 R&D(연구개발)에 나서는 등 경쟁력 제고에 앞장서고, 각 정부부처는 반도체 공급망, 기술 강화를 위해 'K칩스법(반도체특별법)' 제정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진단이다.
특히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위해서는 메모리 분야 역량을 토대로 팹리스(설계) 기술을 강화하는 한편 산·학 연계 및 협력 활성화를 통해 파운드리 성장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산업연구원은 단기적으로는 스마트기기, 자율차, 로봇, 에너지 등 수요에 기반한 과감한 팹리스 기업 육성과 더불어 R&D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 분야와 관련된 핵심 소부장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는 한편, 이 분야에서 요구되는 인재를 양성·보급하는 체계 확충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종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의 강점인 반도체 제조분야에 미국과 일본의 진입이 가시화되고 있어, 세계 파운드리 경쟁구조 변화에 선제적 대응이 긴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분야에서 급격한 성장중인 중국에도 긴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현재 정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국산 AI(인공지능) 반도체를 개발하고 데이터센터를 통해 이를 실증하는 K-클라우드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2030년까지 1조원을 투자해 AI 반도체 등 시스템 반도체 분야를 집중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혹한기' 시기 손실을 만회하고 미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체 반도체 투자 계획을 보다 면밀하게 세울 필요가 있다"면서 "소재부터 제품까지 일원화된 가치사슬(밸류체인) 구축으로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 위상을 제고하는 데 민·관이 긴 호흡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