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건너뛰어 중년의 모습부터 기억함에도 오랫동안 봐온 배우처럼 친숙함이 큰 배우들이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김윤석, 김종수, 김병철, 류승룡, 마동석, 박혁권, 조우진, 박해수, 박호산, 유승목, 정승길, 백현진, 하준석… 아,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많다.
그들은 처음부터 아저씨로 대중의 뇌리에 박히고 마음속에 저장됐지만, 워낙 연기를 잘하고 또렷한 개성을 지녀 자신의 말투와 음색, 표정과 표현법을 ‘빠르고도 선명하게’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남자배우들 이름만 적은 이유는 그러한 여자배우가 없어서가 당연히 아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의 주인공이 아저씨 때부터 눈에 들었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의 스타였던 브루스 윌리스나 주윤발처럼 단박에 마음 한자리를 차지한 남자배우여서다.
다니엘 크레이그다. 이 배우를 처음 본 기억은 ‘툼 레이더’(2001), 안젤리나 졸리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놀랍게 눈길을 끌었다. 그다음은 ‘뮌헨’(2006), 스티븐 스필버그의 매우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영화에서, 단지 액션배우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2006년 말 한국 관객들도 그의 이름을 알게 될 영화가 개봉했다. ‘007 카지노 로얄’. 개봉을 앞두고, 아니 그 이전부터 ‘6대 제임스 본드’를 놓고 캐스팅 논란이 일었다. 영국 신사 느낌이 없고 거친 악역 이미지가 강하다, 금발에 푸른 눈은 역대 제임스 본드에 없었다 등 말이 많았다. 필자는 소수 환영파였다.
007 팬들이 좋아해 마지않았던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 같은 매끈하게 빠진 섹시미가 없어서 좋았다. 007 시리즈를 재미있게 즐기면서도 여성을 동료로서보다 대상화하는 느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치명적 섹시함이 얄미웠던 듯하다. 나라도 반할 것 같아서 설득력은 있는데, 시대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마초남 이미지가 식상했달까.
개봉, 말 그대로 뚜껑이 열리고 나서 반대파들도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역대 최초로 180cm가 되지 않는 키보다 온몸의 다부진 근육에서 나오는 힘 있는 액션, 거의 대역을 쓰지 않아 눈속임 없는 리얼 액션에 열광했다. 여자주인공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 분)와의 관계도 일방적으로 주도함 없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다못해 어딘가 마음이 약해서 밀리고마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이 신선했다.
‘틀린’ 캐스팅은 ‘색다른’ 선택이 됐고, 1962년 ‘007 살인번호’로 시작해 21번째 영화였던 ‘007 카지노 로얄’은 역대 시리즈 최대 흥행작이 됐다. 원작이 된 이안 플레밍의 소설, 그 첫 번째 제목이었던 ‘카지노 로얄’을 그대로 가져와 007 영화를 21세기에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 공과는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에게로 돌려졌다.
말도 안 되지만 마치 내가 캐스팅한 듯, 아니 내가 키운 배우인 듯 기뻤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 세계에서 1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시리즈 최고 흥행작 ‘007 스카이폴’ 역시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한 5개 작품 중에서 나왔다.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카지노 노얄’부터, 21편부터 007시리즈의 세계관은 20편까지 공유된 것과 다르다. 새로이 시작된 역사적 스파이영화 시리즈를 여러 번의 부상과 수술로 온몸 바쳐 일군 배우다 보니 믿음이 더 커졌다. 그래서 OTT에서 ‘오늘은 뭘 볼까’ 고르다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이름이 보이면 주저 없이 택한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가 ‘나이브스 아웃’이다. 1편 격의 ‘나이브스 아웃’은 2019년, 2편 격의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은 지난해 말 공개됐는데. 실제 제작 연도와 상관없이, 근성 있는 기자였던 다니엘 크레이그가(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미카엘 역) 전설의 첩보요원으로 활약하다가(007시리즈) 은퇴하여 탐정이 된 것처럼 상상하니 영화가 더욱 재미있게 다가온다.
‘나이브스 아웃’에서 다니엘 크레이크가 맡은 역은 세계 최고의 탐정 브누아 블랑이다. 어릴 적 브라운관 TV로 보았던 미국 드라마 ‘명탐정 콜롬보’ 속 콜롬보, 어른이라는 게 즐기는 데 아무런 방해물이 되지 않는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코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베네딕트 컴버배치 외에도 오랜 시간 여러 배우의 몸을 재탄생한 셜록 홈즈 등 우리의 콘텐츠 인생을 함께하는 탐정들이 있다.
여기에 브누아 블랑을 새로이 추가하고 싶다. 말하자면 3편, 4편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이다. 브누아 블랑은 기자 미카엘이었을 때처럼 머리를 잘 쓰고 집요하게 추적하고, 첩보원 제임스 본드였을 때처럼 몸도 잘 쓴다. 클래식 정장 스타일의 기존 본드들과 달리 린넨으로 된 캐주얼 정장에 머플러를 두르는 새로운 패션 감각을 자랑했듯, 탐정 블랑도 멋들어지게 입는다.
사실, ‘나이브스 아웃’을 본격적으로 꺼내지 않고 다른 얘기를 한참 한 이유가 있다. 두 편 모두 스릴 넘치는 탐정 추리극이다 보니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그냥’ 시작하기를 바라서다. 딱 두 가지만 얘기하겠다.
먼저 다니엘 크레이그 외에도 연기 좀 한다고 하는 배우들, 유명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 1편에 크리스 에반스와 제이미 리 커티스가 대표적이고, 2편에는 에드워드 노튼과 케이트 허드슨 말고도 자넬 모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두 번째는 살인 추리극이다. 1편에서는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가 숨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2편에서는 억만장자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이 망나니 셀럽 친구들을 그리스의 섬으로 초대해 자신이 내는 살인 추리극 문제를 풀어보라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짐작하겠지만,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에서는 살인 추리극 문제보다 더욱 어렵고 복잡다단하게 얽힌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섬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만큼 부자이고, 주지사 선거에 나갈 만큼 힘 있고, 새로운 연료를 연구해 주목받을 만큼 잘나가는 과학자이고, 모델로 시작해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는 패션디자이너가 됐는데 여전히 모델처럼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함께 SNS 근육질 스타인 그들 사이에는 어떤 비밀이 있길래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걸까. 그들은 스스로 ‘붕괴자들’이라 부른다.
영화를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당연히, 내가 탐정이 되어 진범을 잡는 것이다. 단서와 증거가 될 대사 하나, 장면 하나를 면밀히 수집하고 종합해 살인의 ‘동기’와 ‘실행방법’을 브누아 블랑보다 먼저 추리해 보자.사람으로서, 사회인으로서의 어떤 선을 이미 넘어선 자들, 붕괴자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 다니엘 크레이그와의 경쟁이라 더욱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