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가수들은 해외로 나가는데, 해외 팝스타들 투어 일정엔 한국은 없어요.”
엔데믹 이후 내한 공연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와중에 이게 무슨 말인가 싶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케이팝 성지로 불리는 문화 강국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이 세계 거물급 가수의 공연 사각지대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대규모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다는 것이다.
거물급 스타의 내한 공연이 아주 열리지 않는 건 아니다. 미국 팝스타 포스트 말론은 지난 23일 첫 내한 공연을 펼쳤다. 다만 장소는 서울이 아닌, 경기 일산 킨텍스였다. 주최 측에 따르면 잠실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 공사 등으로 서울의 공연장을 잡지 못한 것이 이유였다.
문제는 킨텍스는 공연장이 아니라 박람회나 전시회 용도로 지어진 곳이라는 점이다. 앞서 SM엔터테인먼트는 그룹 샤이니의 데뷔 15주년 팬미팅을 킨텍스에서 열려다가 잠실실내체육관으로 변경했다. “킨텍스는 공연무대로 적합하지 않다”며 팬들이 보이콧을 해서다. 이번 포스트 말론의 콘서트는 킨텍스 1전시장 4홀과 5홀을 합쳐 임시로 3만명 규모의 공연장을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무대와 스탠딩석 사이에 충분한 높이 차이를 만들지 못해 시야 제한 문제가 발생했고, 예상했던 대로 공연 이후 관객들의 불평 섞인 후기가 잇따랐다.
잠실주경기장 등 리모델링 공사로 인한 장기 휴관에 따라 그보다 체급이 작은 공연장에 대관 신청이 몰리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현재 아이돌 콘서트 대부분이 2만여명 규모의 고척돔과 1만여명을 수용하는 KSPO돔으로 몰리고 있어서 대관을 잡는 것도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나마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로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있지만, 이곳은 잔디 훼손에 대한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면서 2017년 이후 케이팝 뿐만 아니라 해외 가수의 단독 공연도 한 차례도 진행되지 않았다. 지난 8월엔 잼버리 케이팝 슈퍼 라이브 콘서트 개최가 갑작스럽게 잡히면서 축구 팬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결국 대규모 공연장의 부재는 케이팝 아이돌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넘어, 내한 공연 불발의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친한파’ 밴드로 불리는 콜드플레이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월드 투어 일정에도 한국은 모두 빠졌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 공연 논의도 이뤄진 것으로 안다. 그런데 공연장 문제로 성사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올 12월 예정이었던 현대카드 슈퍼콘서트도 비슷한 이유로 열리지 않는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12월 슈퍼콘서트가 결렬된 건 한국에 5만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공연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향후 대안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잠실주경기장은 빨라야 3년 뒤인 2026년 12월에나 다시 문을 열고, 현재 공연이 몰리고 있는 고척돔도 올해 12월5일부터 내년 3월7일까지 공사 예정이다. 2만석 규모로 서울 창동에 지어지고 있는 공연장은 4년 뒤에나 문을 연다. 여기에 CJ라이브시티가 2조원을 들여 일산에 짓고 있는 6만명 규모의 음악 전문 공연장 ‘CJ라이브시티 아레나’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최근 국토교통부는 공사 중단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사실상 내년 6월 완공 계획은 불가능할 거란 의견이 높다.
한 공연 관계자는 “운영 중이던 공연장들이 공사에 들어가면서 서울의 부족한 대형 공연 시설 인프라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라며 “오래전부터 전문 공연장 부재의 문제점이 지적되어 오고 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케이팝 공연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공연장이 없어서 케이팝 가수들을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해외 팝스타들을 불러들일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