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그데이즈’ 윤여정, 세계적 건축가 조민서
준우(탕준상 분)의 청춘 응원하는 ‘어른의 기품’
유해진도 꼽은 명장면 ‘윤-탕의 함박눈 오는 날’
드문 일이지만, 영화를 보다가 감탄이 일 때가 있다. 연출했으나 연출이 느껴지지 않고, 연기했으나 연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영화 ‘도그데이즈’(감독 김덕민, 제작 CJ ENM, 공동제작 JK FILM·CJ ENM STUDIOS·자이온 이엔티㈜, 배급 CJ ENM)에서 그런 장면, 그런 배우를 보았다.
배우 윤여정, 그는 시종일관 자연스럽고 뇌리에 오래 남을 명장면들을 낳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혹자는 그의 연기를 두고 그저 배우 자신 같다고 하거나 매번 비슷한 연기를 한다고도 한다. 필자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매 작품, 매 연기에 배우 고유의 색과 향이 오롯이 각인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고흐의 그림을 단박에 알아보듯 ‘윤여정 특유의 정체성’이다.
윤여정의 연기는 매번 다르다. 멀리 영화 ‘화녀’와 ‘죽여주는 여자’를 끌어와 ‘도그데이즈’(Dog Days)와 비교할 것도 없다. 당장 영화 전작 ‘미나리’와 비교해도 확연히 다르다.
‘미나리’의 순자는 푸근하면서도 주책맞은, 철들지 않아 귀여운 할머니다. ‘도그 데이즈’의 민서는 단지 세계적 건축가여서가 아니라 배달하는 청춘 준우(탕준상 분)를 대하고 잃어버린 반려견 완다를 보호해 준 꼬마 지유(윤채나 분)를 바라보는 태도와 눈빛에서부터 고즈넉한 기품이 흐른다. 미나리의 순자는 혈육 데이빗(앨런 김 분)의 ‘할머니’였지만, 도그 데이즈의 민서는 아직 여물지 않아 어린 이들의 내일을 염려하고 살피는 ‘세상의 어른’이다.
그런 다름이 웃음 질 때 눈 모양 하나, 말할 때 입 모양 하나, 상대를 부르는 손짓 하나에 차이를 만든다. 배우 윤여정이 보이는 작품마다의 미세한 차이를 극찬하려는 게 아니다. 소소한 부분들까지 다를 만큼,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서고 영화 안에 녹아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어쩌면 고흐의 아를 시기 그림 ‘밤의 카페 테라스’와 아를 인근 생 레미 시기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과 하늘을 표현한 방식과 기법은 완전히 다른데 우리가 막연히 ‘고흐의 표현법’으로 인식하고 알아보듯 윤여정의 다름을 ‘윤여정 연기’로 뭉뚱그려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흐처럼, 워낙 개성 넘치는 표현법을 지녀 색채와 스타일이 개성적이니까. 또 어찌나 연기가 자연스러운지 실제 모습일 것만 같으니까.
처음으로 돌아가, 개인적 취향을 전제로, 최고의 연출은 지독히 연출했으되 연출한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최고의 연기는 충분히 연기했으되 연기가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박진감’, 진짜에 가까운 느낌, 숱한 콘텐츠가 꾸며진 이야기를 보는 이가 사실로 받아들여 웃고 울며 즐기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손에 땀을 쥐기를 바라지 않는가.
여기서 관건은 배우 윤여정이 ‘도그데이즈’의 건축가 조민서를 지독히 준비해 충분히 연기했는가, 애초 시나리오에 적힌 캐릭터 이름이 ‘윤여정’이기도 했으니 편안히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는가다. 그가 무던히 연기했음에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우리 눈에 윤여정처럼 보인다면, 연기의 최고 경지다.
지난 26일 서울 삼청로 카페에서 이뤄진 라운드 인터뷰, 본인 말투의 대사인지 혹은 애드리브가 많았던 건지에서부터 ‘자연스러운 연기’에 관한 질문이 시작됐다.
“저 대본 안 바꿔요. 저는 구시대 사람이기도 하고, 김수현 작가가 토시도 바꾸지 말라 했고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에요. 저는 대본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어떤 이들은 금방 손 놓고 그러는데, 덮었다 또다시 보고 또 보고 그래요.”
윤여정은 영화 ‘돈의 맛’(2012)으로 칸국제영화제 현지에서 만났을 때, 대본을 자기 전까지 보고 자다가도 또 잘 외웠나 다시 열어 본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과 같은 얘기인지 물었다.
“여전히 바보같이, 미련하게, 자다가 또 보고 그래요. (이상하다는 듯) 사람들은 잘 안 믿더라고. 지금은 늙어서 더 보게 돼요. (대본은) 마르고 닳도록 외워야 돼요. 어떻게 편히 해요, 저는 아직도 긴장돼요.”
“저를 매번 다르게 느꼈다면, 또 보고 또 보면서 그 인물이 되는 것 같아요. 대사, 10번 보면 외우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죠. 모차르트나 바흐의 교향곡, 아이브스의 콩코드, 완독한 사람이 없다잖아요. (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아직도 하루 세 시간, 네 시간 연습한대요. 물론 난 그렇게까지는(작품이 없을 때도 매일) 못하는데. 조성진 보고 그랬어, 어떻게 그걸 외우냐? 아무리 젊었어도. 그랬더니 ‘저는 같은 거 하잖아요, 선생님은 매번 새로운 거 하시는데’. 어머, 그럼 내가 이긴 거야? 그랬어요, 우스갯소리지만은.”
윤여정의 정확한 대사에 관한 얘기는 ‘도그데이즈’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좋은 호흡을 보여준 청년 배우 탕준상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지난 24일 열린 언론시사회와 다음날 열린 미디어데이 자리에서 탕준상은 조사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 그대로 연기하는, 그러면서도 마치 본인 생각을 즉석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연기하는 대선배 윤여정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밝혔다. 큰 자극이 됐고, 그래서 자신도 더욱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며 “선생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저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더 분발했다”고 회상했다.
본인이 밝히는 나이 77세에도, 몇 날 며칠을 마르고 닳도록 대사를 외우고 대본을 보고 또 봤으면서도 촬영을 앞둔 밤이면 잠을 설치며 준비하는 윤여정. 책을 파다 보면 문리(文理)가 터지듯 책(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부르는 말)을 계속 읊조려 끝내 캐릭터를 만나고 그 인물이 되는 배우. 작품 전체를 마음과 머릿속에 담았음에도, 아니 담았기에 ‘처음 대면한 상황에 처음 해 보는 말처럼’ 연기하는 사람.
그래서일까. 영화 ‘도그데이즈’의 윤여정은 기품 있게 보인다, 기품 있는 건축가 조민서로 보인다. 또 물었다. ‘배우로서 나는 누구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걸까요, ‘사람 별거 있나, 밥 먹고 사는 거 똑같지’라는 사람 윤여정의 인생철학에서 연유된 걸까요.
“칭찬이죠? 과찬이십니다. 후자예요. 조민석, 세계적 건축가랑 친해요. 평소 (음식 먹다가) 흘리고 이런 거 보면, 어떻게 세계적 상을 받고 비엔날레를 가나 싶어요. 일상과 직업은 다르다, 아무 상관 없다는 거죠. 그 인물의 직업에 대해 대체로 표현하려 하는데, 표현 못해요. 평생 그 직업으로 살아온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다만, 메소드 액팅이라고 하죠. 저는 언제든지 캐릭터를 보면 ‘내가 이 상황이라면’ ‘내가 이 여자라면’ 그 생각만 해요. 그리고 또 하나, 내 주위는 거의 아프고 병들고 그랬는데 제게 일은 일상이 됐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감사해하면서 일해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요.”
열심히 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잘한 결실이다. 영화 ‘도그데이즈’에는 명장면이 꽤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중 백미는 함박눈이 내리는 골목길에서 배우 윤여정과 탕준상이 전봇대에 전단지를 붙이며 빚었다. 글로 읽지 말고 귀로 먼저 들었으면 하는 명대사가 인생 선배 조민서의 진심을 타고 진정 푸르러야 하나 아직 그렇지 못한 청춘 준우에게 건네진다.
로맨틱 코미디 ‘달짝지근해: 7510’에 이어 ‘도그데이즈’에서는 김서형(진영 역)과 신선한 케미스트리(화학반응)를 튀기며 ‘지천명 멜로장인’의 위치를 굳혀 가고 있는 유해진(민상 역)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윤-탕의 눈 오는 날을 꼽았다. “어쩜 그렇게 담백한 연기를 하시는지!”. 날씨 예보에 없던 하얀 눈이 37년 차 선후배의 연기를 어떻게 도왔는지, 천우신조의 명장면을 극장에서 확인해 보자.